알다시피 내 사랑의 언어는 글쓰기잖아. 매일 언니를 수신인으로 한 긴 메시지를 쓰는데, 그걸로 부족해서 이제는 산문을 쓰고 있네.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종류의 사랑이 있는데, 나한테는 그게 언니인가 봐. 드디어 언니를 써도 안전한 지면을 찾아서 다행이야. ‘고등학생으로서 적합한 주제’로 쓰라는 학교 문예제전 포스터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던 나를 기억해. 저곳에서 우리의 사랑은 검열당할 것 같아서. 적합하지 않은 나의 사랑에 빨간 줄이 그어질까 봐 무서워 도망쳤어.
검열당할 일 없는 이곳의 흰 스크린 앞에서 안심하며 나는 내 서랍을 열어. 그 사람의 방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데, 서랍은 그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이잖아. 내 서랍 속을 언니에게 특별히 공개할게. 사실 내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는, 256km가 있어. 언니와 나, 대구와 경기도 사이의 거리. 왕복 십만 원에 여덟 시간이 걸리는 우리 사이의 거리. 꾹꾹 눌러 담아둔 애증의 256km야. 직장인 이성 커플도 버거워할 거리를 우리는 학생 동성 커플로서 살아내고 있네. 언니가 보고 싶을 때 서랍을 열면 256km는 아주 작고 한심해 보일 때도, 거대하고 무시무시해 보일 때도 있어. 가끔 걔는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라고 속삭이기도 해. 그럼 나는 그 소리가 거실로 새어 나갈까 황급히 서랍을 닫지. 나의 사랑하는 호모포비아 가족이 256km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아. 양성애는 존재하지 않아, 내가 널 잘못 키웠다, 넌 오만하고 예의 없고 거만해. 마지막으로는 그런 말들을 들었었네. 잘못 키운 딸이 서랍 속에 256km를 키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나나 256km 둘 중 하나는 집 밖으로 쫓겨나게 될걸. 그런 미래는 웬만하면 맞이하고 싶지 않아.
내가 256km의 협박에 넘어갔던 날도 기억해. 결국 들키고 말 거야, 돈도 시간도 없잖아, 곧 헤어지고 말 거야, 이 관계를 계속하는 건 언니에게 피해가 갈 뿐이야. 최대한 빨리 이별하는 게 좋을 거라 믿어서 울면서 전화로 이별을 고했었지. 24시간도 안 되어 내가 미쳤었다고 언니를 붙잡았지만 말이야.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서 언니가 없으면 내가 죽겠다 싶었어. 같은 시각 언니도 계속 울고 있었다는 걸 안 건 나중의 일이야. 또다시 울면서 전화로 재회하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 생각했어.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 왜 이 세상도, 내 가족도, 256km도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할까? 사랑을 증명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뇌 혹은 심장을 열어서 보여주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는 없으니 대신 나는 언니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해. 우리의 사랑이 울적해지면 안 되니까, 현실 같은 건 몽땅 잊고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는 거야. 우리가 손바닥을 맞대고 256km를 납작하게 누르게 될 그날을.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랑하는 언니를 제대로 소개해 줄 수 있을 그날을.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사랑은 우리만의 것이 되겠지. 그날만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
그날이 너무 멀다면, 내가 상금을 받은 미래를 상상하자. 사랑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굶기잖아. 언니도 나도 교통비를 포함한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려면 생활비를 떼어 써야 하니까. 상금을 받게 된다면 언니 교통비에 밥값까지 다 내주고 싶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지. 상금을 받는 미래도, 256km를 납작하게 누르는 미래도 도래하지 않을지 몰라. 나는 영원히 서랍 속에 256km를 키우게 될지도 모르고.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 모든 미래에서 나는 언니를 사랑할 거라는 거야.
사랑해. 직접 지은 이름처럼 빛나는 사람인 언니를, 나는 256km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어.
감히 누가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어?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라온님의 글에서 현재 진행형의 연애가 품은 설렘과 불안, 기쁨과 슬픔의 감정들을 진실하고 솔직하게 그려낸 점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특히, ‘서랍’이라는 일상의 공간을 256km으로 확장한 담대한 상상력은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거리는 단순한 숫자나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왕복 여덟 시간의 물리적 거리이자, 협박과 혐오의 소리였으며, 그리고 사랑을 시험하는 무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56km을 납작하게 눌러 버릴 미래를 소환하며, 라온님의 목소리가 시속 256km의 속도감으로 달려 나가는 순간, 무지개 빛의 짜릿함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검열되지 않은 마음을 펼쳐 보여주어서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다랴 |
알다시피 내 사랑의 언어는 글쓰기잖아. 매일 언니를 수신인으로 한 긴 메시지를 쓰는데, 그걸로 부족해서 이제는 산문을 쓰고 있네.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종류의 사랑이 있는데, 나한테는 그게 언니인가 봐. 드디어 언니를 써도 안전한 지면을 찾아서 다행이야. ‘고등학생으로서 적합한 주제’로 쓰라는 학교 문예제전 포스터 앞에서 한참을 서성였던 나를 기억해. 저곳에서 우리의 사랑은 검열당할 것 같아서. 적합하지 않은 나의 사랑에 빨간 줄이 그어질까 봐 무서워 도망쳤어.
검열당할 일 없는 이곳의 흰 스크린 앞에서 안심하며 나는 내 서랍을 열어. 그 사람의 방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데, 서랍은 그중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이잖아. 내 서랍 속을 언니에게 특별히 공개할게. 사실 내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는, 256km가 있어. 언니와 나, 대구와 경기도 사이의 거리. 왕복 십만 원에 여덟 시간이 걸리는 우리 사이의 거리. 꾹꾹 눌러 담아둔 애증의 256km야. 직장인 이성 커플도 버거워할 거리를 우리는 학생 동성 커플로서 살아내고 있네. 언니가 보고 싶을 때 서랍을 열면 256km는 아주 작고 한심해 보일 때도, 거대하고 무시무시해 보일 때도 있어. 가끔 걔는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라고 속삭이기도 해. 그럼 나는 그 소리가 거실로 새어 나갈까 황급히 서랍을 닫지. 나의 사랑하는 호모포비아 가족이 256km의 존재를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아. 양성애는 존재하지 않아, 내가 널 잘못 키웠다, 넌 오만하고 예의 없고 거만해. 마지막으로는 그런 말들을 들었었네. 잘못 키운 딸이 서랍 속에 256km를 키우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나나 256km 둘 중 하나는 집 밖으로 쫓겨나게 될걸. 그런 미래는 웬만하면 맞이하고 싶지 않아.
내가 256km의 협박에 넘어갔던 날도 기억해. 결국 들키고 말 거야, 돈도 시간도 없잖아, 곧 헤어지고 말 거야, 이 관계를 계속하는 건 언니에게 피해가 갈 뿐이야. 최대한 빨리 이별하는 게 좋을 거라 믿어서 울면서 전화로 이별을 고했었지. 24시간도 안 되어 내가 미쳤었다고 언니를 붙잡았지만 말이야.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어서 언니가 없으면 내가 죽겠다 싶었어. 같은 시각 언니도 계속 울고 있었다는 걸 안 건 나중의 일이야. 또다시 울면서 전화로 재회하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뭘까 생각했어.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데, 왜 이 세상도, 내 가족도, 256km도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할까? 사랑을 증명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뇌 혹은 심장을 열어서 보여주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럴 수는 없으니 대신 나는 언니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해. 우리의 사랑이 울적해지면 안 되니까, 현실 같은 건 몽땅 잊고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는 거야. 우리가 손바닥을 맞대고 256km를 납작하게 누르게 될 그날을. 사랑하는 가족에게 사랑하는 언니를 제대로 소개해 줄 수 있을 그날을. 그때 비로소 우리의 사랑은 우리만의 것이 되겠지. 그날만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
그날이 너무 멀다면, 내가 상금을 받은 미래를 상상하자. 사랑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우리를 굶기잖아. 언니도 나도 교통비를 포함한 데이트 비용을 부담하려면 생활비를 떼어 써야 하니까. 상금을 받게 된다면 언니 교통비에 밥값까지 다 내주고 싶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는 내가 결정하는 게 아니지. 상금을 받는 미래도, 256km를 납작하게 누르는 미래도 도래하지 않을지 몰라. 나는 영원히 서랍 속에 256km를 키우게 될지도 모르고.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 모든 미래에서 나는 언니를 사랑할 거라는 거야.
사랑해. 직접 지은 이름처럼 빛나는 사람인 언니를, 나는 256km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어.
감히 누가 이게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어?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라온님의 글에서 현재 진행형의 연애가 품은 설렘과 불안, 기쁨과 슬픔의 감정들을 진실하고 솔직하게 그려낸 점을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특히, ‘서랍’이라는 일상의 공간을 256km으로 확장한 담대한 상상력은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거리는 단순한 숫자나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왕복 여덟 시간의 물리적 거리이자, 협박과 혐오의 소리였으며, 그리고 사랑을 시험하는 무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256km을 납작하게 눌러 버릴 미래를 소환하며, 라온님의 목소리가 시속 256km의 속도감으로 달려 나가는 순간, 무지개 빛의 짜릿함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검열되지 않은 마음을 펼쳐 보여주어서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다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