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를 반으로 접을 때, 최대 몇 번까지 접을 수 있을까? 일곱 번을 접으면 사람의 힘으로는 더 이상 접을 수 없다고 한다. 프레스 같은 기계를 사용한다면 더 접을 수도 있겠지만, 물리적으로 접을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사람은 몇 번까지 접을 수 있을까?
나는 열여덟 살이고, 여성이고, 대학생이고, 동성애자다. 사실 나는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분명 내 일부지만, 내가 햄버거를 시킬 때 꼭 피클을 빼 달라고 한다는 사실만큼 하찮은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있을 때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 전혀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흔히들 하는 남자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푸념에 공감하는 것, 인스타그램에 뜨는 이성애자 커플을 보며 부럽다고 친구들과 떠드는 것 같은 일들에 나는 정말로 재능이 있었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은 절대로 들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나랑은 다른 세상 사람들 일이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길 바랐다. 내가 좋아하는 애 앞에서도 그랬다. 오히려 더 심하게 성소수자인 내 모습을 접어서 부정했다.
진실은 어떤 방식으로 애를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말하지 않거나, 암시하지 않거나, 쓰지 않거나, 보여주지 않더라도 진실은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어딘가에 숨길 수는 있다.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 이상 이 서랍 안에 진실이 있다는 사실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부디 나조차도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SNS에도, 일기장에도 차마 쓰지 않았다. 나는 레즈비언인 내 모습을 접을 수 있을 때까지 접어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아니, 접혀서 넣어졌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사회의 압박에 의해 마치 기계로 누르듯 나를 없애서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혔다. 내가 나를 부정하게 된 것은 내 의지였지만 내 의지가 아니었다. 사람이 접히는 데는 한계가 없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한 번도 자신에게 솔직해 본 적 없는 내가 이 백일장에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어떤 사건 때문이다. 나는 자퇴를 하고 수능을 봐서 남들보다 대학에 조금 일찍 가게 됐는데 대학에는 무려 ‘성소수자 동아리’가 있었다. 심지어 대학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는 ‘퀴어 게시판’이 있었다. 무조건 숨겨야 하는 것, 없어져야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나는 지금까지 그걸 몰랐던 거고?
동아리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지금도 숨기고 있는데, 내 모든 걸 부정했는데 저 사람들은 왜 밝히고 다니나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뒤틀린 분노, 나를 부정한 시간들에 대한 억울함과 부끄러움, 나에 대한 미안함,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에 대한 부러움이 한데 섞여 어지러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동아리나 커뮤니티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을 부정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도 부정 중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사회적 시선 때문에 자신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실만으로도 위안과 자신감을 얻게 되는 법이다.
나는 나를 더 이상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서랍을 열고 하도 접어대서 점처럼 작아진 나를 꺼냈다. 사회도 사람들도 내 존재를 부정하는데 나까지 나를 부정하면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조심조심 나를 펼쳐 자국이 잔뜩 난 내 모습을 안아주기로 했다. 접힌 자국을 새 종이처럼 펼칠 수는 없겠지만 그 고뇌의 과정들마저 사랑하기로 했다.
여전히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하거나, 없어졌으면 하거나, 차라리 레즈비언이 아니었으면 한다는 이유에서는 아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나에게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이 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기애의 시작이었다.
나는 열여덟 살이고, 여성이고, 대학생이고, 동성애자다. 사실 나는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이 꽤 중요하고, 꽤 마음에 든다. 나에게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인정해주는 것이다.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999님의 진솔한 선언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읽는 이의 흥미를 끌어내는 도입부, 글의 처음과 끝에 닮은꼴로 배치한 문단의 변주 등 짧은 글을 짜임새 있게 완성한 솜씨가 돋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선언 자체가 지닌 힘이 컸습니다. 서랍 속에 접혀 있던 존재를 비로소 꺼내어 펼치고 또 펼쳐내는 과정을 나누어주신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심사위원 수빈 |
종이를 반으로 접을 때, 최대 몇 번까지 접을 수 있을까? 일곱 번을 접으면 사람의 힘으로는 더 이상 접을 수 없다고 한다. 프레스 같은 기계를 사용한다면 더 접을 수도 있겠지만, 물리적으로 접을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 사람은 몇 번까지 접을 수 있을까?
나는 열여덟 살이고, 여성이고, 대학생이고, 동성애자다. 사실 나는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분명 내 일부지만, 내가 햄버거를 시킬 때 꼭 피클을 빼 달라고 한다는 사실만큼 하찮은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있을 때 나 자신을 부정하는 것에 전혀 불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흔히들 하는 남자 취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남자친구를 사귀고 싶다는 푸념에 공감하는 것, 인스타그램에 뜨는 이성애자 커플을 보며 부럽다고 친구들과 떠드는 것 같은 일들에 나는 정말로 재능이 있었다.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은 절대로 들키면 안 되기 때문이다. 나는 오히려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나랑은 다른 세상 사람들 일이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길 바랐다. 내가 좋아하는 애 앞에서도 그랬다. 오히려 더 심하게 성소수자인 내 모습을 접어서 부정했다.
진실은 어떤 방식으로 애를 써도 없어지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말하지 않거나, 암시하지 않거나, 쓰지 않거나, 보여주지 않더라도 진실은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렇지만 어딘가에 숨길 수는 있다. 서랍을 열어보지 않는 이상 이 서랍 안에 진실이 있다는 사실은 나 말고는 아무도 모른다. 부디 나조차도 몰랐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SNS에도, 일기장에도 차마 쓰지 않았다. 나는 레즈비언인 내 모습을 접을 수 있을 때까지 접어 서랍 깊숙한 곳에 넣었다. 아니, 접혀서 넣어졌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에, 사회의 압박에 의해 마치 기계로 누르듯 나를 없애서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혔다. 내가 나를 부정하게 된 것은 내 의지였지만 내 의지가 아니었다. 사람이 접히는 데는 한계가 없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한 번도 자신에게 솔직해 본 적 없는 내가 이 백일장에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어떤 사건 때문이다. 나는 자퇴를 하고 수능을 봐서 남들보다 대학에 조금 일찍 가게 됐는데 대학에는 무려 ‘성소수자 동아리’가 있었다. 심지어 대학 커뮤니티인 에브리타임에는 ‘퀴어 게시판’이 있었다. 무조건 숨겨야 하는 것, 없어져야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나는 지금까지 그걸 몰랐던 거고?
동아리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지금도 숨기고 있는데, 내 모든 걸 부정했는데 저 사람들은 왜 밝히고 다니나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뒤틀린 분노, 나를 부정한 시간들에 대한 억울함과 부끄러움, 나에 대한 미안함,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는 마음가짐에 대한 부러움이 한데 섞여 어지러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동아리나 커뮤니티에 있는 사람들도 자신을 부정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아마 지금도 부정 중인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사회적 시선 때문에 자신을 밝히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사실만으로도 위안과 자신감을 얻게 되는 법이다.
나는 나를 더 이상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서랍을 열고 하도 접어대서 점처럼 작아진 나를 꺼냈다. 사회도 사람들도 내 존재를 부정하는데 나까지 나를 부정하면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조심조심 나를 펼쳐 자국이 잔뜩 난 내 모습을 안아주기로 했다. 접힌 자국을 새 종이처럼 펼칠 수는 없겠지만 그 고뇌의 과정들마저 사랑하기로 했다.
여전히 내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레즈비언이라고 커밍아웃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이유는 내가 나 자신을 부정하거나, 없어졌으면 하거나, 차라리 레즈비언이 아니었으면 한다는 이유에서는 아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나에게 레즈비언이라는 정체성이 내 생각보다 크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자기애의 시작이었다.
나는 열여덟 살이고, 여성이고, 대학생이고, 동성애자다. 사실 나는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것이 꽤 중요하고, 꽤 마음에 든다. 나에게 내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내가 나로 있을 수 있게 인정해주는 것이다.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999님의 진솔한 선언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읽는 이의 흥미를 끌어내는 도입부, 글의 처음과 끝에 닮은꼴로 배치한 문단의 변주 등 짧은 글을 짜임새 있게 완성한 솜씨가 돋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선언 자체가 지닌 힘이 컸습니다. 서랍 속에 접혀 있던 존재를 비로소 꺼내어 펼치고 또 펼쳐내는 과정을 나누어주신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심사위원 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