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무지개백일장 수상작

외계인도 人이더라 / 이지학, 2009년생, 띵동상

 “ㅇㅇ이는 외계인 같아!” 내가 중학생 때 들은 말이다. 대한민국 5000만 국민 중 하나, 중학교 3학년, 사춘기 청소년 등등 날 수식하는 말들은 대체로 평범한 편이었다. 허나 중학교 3학년의 어느 날, 내 정체를 다른 이가 밝혀주었다. 나도 모르는 내 정체였다. 외계인. 영어로는 에일리언alien. 사전상으론 지구 이외의 천체에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지적인 생명체이다. 하지만 에일리언은 좀 다르다. 외계에 사는 존재뿐만 아니라 외국인 또한 에일리언이라고 한다. 주로 타국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한다. 아무튼 뭔가 동떨어져 있는 존재인 건 똑같았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친히 밝혀주셨다.


 언제부터 주류와 멀어진 걸까 돌이켜 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난 교과서를 책상 서랍 속에 가득 넣어 놓곤 했다. 사물함과 책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2학년, 3학년…… 점차 학년이 올라갈수록 내 또래 여자애들은 매 쉬는 시간마다 사물함에 교과서를 가지런히 놓으며 책상 서랍을 단정하게 하기 시작했다. 난 여전히 귀찮았다. 이유는 그것뿐이었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내가 굳이 주류가 될 필요를 못 느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내 딱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서 딱지치기 1인자로 군림하기였다.


 그렇게 ‘교과서 책상 서랍에 쑤셔 넣기’에서 시작된 나의 외계인화는 중학교로 가서도 멈추지 않았다. 근데 문제가 생겼다. 중학교는 주류가 아니면 철저히 배척받고 조롱받는, 주류가 곧 권력인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인스타 안 하기에서 한 발짝, 연애에 관심 없음에서 한 발짝, 남자 아이돌 안 좋아하기에서 한 발짝, 그렇게 나는 서서히 지구에서 멀어졌다. 근데 이 멀어지는 과정에서 ‘연애에 관심 없음’은 사춘기 청소년과는 꽤나 맞지 않는 속성이었기에, 나의 눈에도 띄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누군가를 연애적으로 좋아한 적도 없었고 누가 나를 좋아해도 관심이 없었다. 생각을 마쳤다. 아, ‘누군가’를 왜 남자로만 생각했을까. 내 무의식 속의 편견이 나를 가뒀구나. 그래, 나는 여자를 좋아하나 보다. 여자를 좋아하면 되겠다.


 하지만 이 깨달음의 시원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여자에게도 연애적으로 좋아하는 감정이 생기질 않았다. ‘좋아함’은 다짐으로 시작될 수 없었다. 또 다른 깨달음을 얻고 21세기다운 방식으로 접근했다. 인터넷이었다. 찾아보니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성애자’라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종류는 여러 가지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동성과 이성 모두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크게 시원하진 않았다. 이것저것 종류가 너무 많은 개념이라 나를 확실하게 정의하긴 힘들었다. 그래서 정의 안 했다. 엠비티아이도 의심하는 의심병인 내가 나를 정의하는 순간 삶이 너무나 피곤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깊게 생각 안 했다. 내가 무성애자인 걸 알았으니 그거면 된 거였다. 나를 완벽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유기체적 마인드를 갖기로 했다.


 사실 내가 책상 서랍에 박아 놨던 건 교과서가 아니었다. 나의 ‘고집’이었다. 이 고집이 나를 ‘나’로 있게 해 주었다. 외계인도 자신들의 서식지에서는 그냥 인人 아닐까? 외계인의 입장에서는 지구인이 오히려 ‘외계인’일 것이다. 사실 지구에 사는 우리도 주류인 취미를 가졌더라도 타국에 가서, 타지에 가서, 혹은 집을 나와서 외계를 느낄 것이다. 외계인이 주류가 된다면 인간이 외계인이 되고 또 외계인은…… 단순하게 살자. 과거 외계인, 현재 외계인, 미래 외계인 모두가 외계인이라면 우린 결국 사람이 된다. 정체가 들켜도 너무 걱정 마라. 외계인이라 나를 칭하는 사람들이 나에겐 외계인이다. 그런 이들에게는 “인간인 네가 내 입시 좀 대신해 주면 안 될까?”라고 묻고 싶다. 지구상의 모든 외계인들에게 이 글을 바친다.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이지학님의 글에서 이 사회의 경직된 공기를 유연하게 가르며 살아내는 힘을 느꼈습니다. 재치 있는 문체는 글이 담고 있는 메시지와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내용 전체를 담아내는 훌륭한 그릇으로 기능합니다. 때로는 유머야말로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담대한 배포 그 자체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심사위원 수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