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체화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 안에 울리는 감각을 ‘파동’이라 불렀다. 그 파동은 아주 느리게, 조용히 다가왔다.
첫 번째 파동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자라나는 내 몸이 낯설고 무서웠다. 가슴이 생기는 게 두려웠고, 그게 사라지는 상상을 자주 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 나이 땐 다 그렇다”며 넘겼다. 나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그 말에 나를 꾹 눌러두었다.
두 번째 파동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같은 반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감정은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인터넷을 뒤지며 ‘지향성’, ‘퀴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라는 설명은 어딘가 나에게 맞지 않는 옷 같았지만, 처음이라 그런 거라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아이에게 고백했고, 뜻밖에도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점점 ‘남자로서’ 그 아이를 지켜주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그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겪은 그루밍 피해가 내 안 깊은 곳에 남아, 그림자처럼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라는 정체성을 애써 외면했고, 그렇게 부정하며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짧은 머리에 바지 교복을 입고, 체육을 잘하는 내 모습에 나를 남자아이로 착각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가까워지긴 힘들었다. 그래서 학기 초에 적응하기 어려워 상담을 받았는데 돌아온 말은 “네가 남자같이 해서 그렇지”였다. 그 말을 곱씹으며 나는 ‘남자 같다’는 게 뭘까를 한참 고민했지만, 끝내 남자 같은 건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 그러다가 다음 해, 대안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고, 성별이 아니라 학년으로 사람을 나눴다. 내가 처음으로 숨 쉴 수 있었던 공간. 무엇보다 나를 지지해 주시는 선생님을 만났고, 퀴어 이론에 관해 공부하며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걸 느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세 번째 파동이 찾아왔다.
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고, 고민에 빠졌다. 내가 ‘이성’이었다면 이 감정은 진짜 사랑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동경’으로 치부되지 않았을까.
평범한 남녀의 사랑을 보면 이유 없이 마음이 아팠다. 우울한 날들이 이어졌고, 기숙사 생활도 힘들어졌다. 여학생 기숙사, 여자 샤워실, 함께 씻는 친구들 그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왜 여기 있어야 하지?’ 그 질문을 하면서도, 애써 부정했다.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나를 덮었다. 하지만 물속의 파동처럼, 손을 뻗으면 더 커지고, 더 퍼졌다. 그럴수록 내 안의 파동은 더 크게, 거세게 흔들렸다.
목욕탕에 가면 숨이 막혔고, 누군가가 나를 ‘여자’로 인식하는 것이 견디기 어려워졌다. 감정은 분명한데, 정체성은 자꾸 어긋났다. 완전한 남자라고 지칭하기엔 그것 또한 어려웠다. 결국 나는 그 흔들리는 상태 그대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남자와 여자로 나뉜 줄, 성별을 묻는 OMR 카드, 명찰과 학생증. 심지어 여자처럼 보여서 친구가 생겼다는 말조차 싫었다.
나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혼란’이라 불렀고, ‘비정상’이라 여겼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혼란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학교에 다닌 지 한 달 만에 자퇴라는 게 말도 안 되고 한심해 보였지만 정말 이대로 가다간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부모님께 자퇴 얘기를 꺼내 보았지만, 친구도 잘 사귀고 학교가 재밌다는 내 얘기를 들으신 부모님은 이해하실 수 없었고 나는 여전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있는 진실을. 답을 찾아야만 했다. 계속해서 파동은 울리고 있었다. 매일 같이 울려대는 파동에 머릿속은 매일 복잡했고 결국 부모님께 정말 내가 학교를 그만두어야만 했던 이유는 말하지 못한 채. 다른 말로 넘긴 채 자퇴했다. 자퇴하는 날마저 자퇴 서류에 내 성별을 체크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나는 쉽게 체크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여자라고 적힌 칸에 체크하긴 했지만, 더 이상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협은 크게 느끼지 않았지만, 자퇴하고서도 매일 계속해서 파동의 물음에 답해야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트랜스 매스큘린’이라는 단어를 마주했고 그 단어는 내 안의 파동에 형태를 부여했다.
나는 흔들리며 나를 알아갔고, 흔들림 속에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를 지칭하는 단어를 되새기며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어색하지 않았다. 너무나 마음이 편안했다. 파동이 처음 찾아왔을 때 나는 갑작스러운 파동에 너무나 당황스러웠고 흔들린다는 것은 나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파동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그렇게 파동은 내게 알려주었다.
흔들려도 괜찮다는걸.
[심사위원 작품평] 「파동의 울림」은 사는 동안 혼란, 비정상, 불안, 부정, 어긋남 등 다양한 이름으로 찾아오는 ‘흔들림’에 관한 기록이자 동시에 그 부대낌 속에서도 자신을 지칭할 수 있는 단어를 스스로 발견하고 새기며 “흔들려도 괜찮아” 삶을 긍정하는 과정을 담담히 적은 글입니다. 심사위원들은 고요한 수면 위로 천천히 퍼지는 듯 동심원 같은 린 님의 글을 통해 우리가 ‘평등하게’ 진동하며 파동을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쳤습니다. 심사위원 김현 |
나는 정체화를 하는 과정에서 많은 혼란을 겪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 안에 울리는 감각을 ‘파동’이라 불렀다. 그 파동은 아주 느리게, 조용히 다가왔다.
첫 번째 파동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자라나는 내 몸이 낯설고 무서웠다. 가슴이 생기는 게 두려웠고, 그게 사라지는 상상을 자주 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그 나이 땐 다 그렇다”며 넘겼다. 나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그 말에 나를 꾹 눌러두었다.
두 번째 파동은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같은 반 여자아이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 감정은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인터넷을 뒤지며 ‘지향성’, ‘퀴어’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라는 설명은 어딘가 나에게 맞지 않는 옷 같았지만, 처음이라 그런 거라고,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 아이에게 고백했고, 뜻밖에도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점점 ‘남자로서’ 그 아이를 지켜주고 싶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그 감정을 인정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겪은 그루밍 피해가 내 안 깊은 곳에 남아, 그림자처럼 나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나는 남자라는 정체성을 애써 외면했고, 그렇게 부정하며 살아야만 했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이 되었다. 짧은 머리에 바지 교복을 입고, 체육을 잘하는 내 모습에 나를 남자아이로 착각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하지만 가까워지긴 힘들었다. 그래서 학기 초에 적응하기 어려워 상담을 받았는데 돌아온 말은 “네가 남자같이 해서 그렇지”였다. 그 말을 곱씹으며 나는 ‘남자 같다’는 게 뭘까를 한참 고민했지만, 끝내 남자 같은 건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 쉬운 결정은 아니었지만, 마음은 조금 편안해졌다. 그러다가 다음 해, 대안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고, 성별이 아니라 학년으로 사람을 나눴다. 내가 처음으로 숨 쉴 수 있었던 공간. 무엇보다 나를 지지해 주시는 선생님을 만났고, 퀴어 이론에 관해 공부하며 내 안의 무언가가 깨어나는 걸 느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세 번째 파동이 찾아왔다.
다시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고, 고민에 빠졌다. 내가 ‘이성’이었다면 이 감정은 진짜 사랑으로 받아들여졌을까, ‘동경’으로 치부되지 않았을까.
평범한 남녀의 사랑을 보면 이유 없이 마음이 아팠다. 우울한 날들이 이어졌고, 기숙사 생활도 힘들어졌다. 여학생 기숙사, 여자 샤워실, 함께 씻는 친구들 그 속에서 나는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왜 여기 있어야 하지?’ 그 질문을 하면서도, 애써 부정했다. 아닐 거야.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나를 덮었다. 하지만 물속의 파동처럼, 손을 뻗으면 더 커지고, 더 퍼졌다. 그럴수록 내 안의 파동은 더 크게, 거세게 흔들렸다.
목욕탕에 가면 숨이 막혔고, 누군가가 나를 ‘여자’로 인식하는 것이 견디기 어려워졌다. 감정은 분명한데, 정체성은 자꾸 어긋났다. 완전한 남자라고 지칭하기엔 그것 또한 어려웠다. 결국 나는 그 흔들리는 상태 그대로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남자와 여자로 나뉜 줄, 성별을 묻는 OMR 카드, 명찰과 학생증. 심지어 여자처럼 보여서 친구가 생겼다는 말조차 싫었다.
나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 흔들림을 ‘혼란’이라 불렀고, ‘비정상’이라 여겼다.
학교에 다니는 동안 혼란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다. 학교에 다닌 지 한 달 만에 자퇴라는 게 말도 안 되고 한심해 보였지만 정말 이대로 가다간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부모님께 자퇴 얘기를 꺼내 보았지만, 친구도 잘 사귀고 학교가 재밌다는 내 얘기를 들으신 부모님은 이해하실 수 없었고 나는 여전히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내 안에 있는 진실을. 답을 찾아야만 했다. 계속해서 파동은 울리고 있었다. 매일 같이 울려대는 파동에 머릿속은 매일 복잡했고 결국 부모님께 정말 내가 학교를 그만두어야만 했던 이유는 말하지 못한 채. 다른 말로 넘긴 채 자퇴했다. 자퇴하는 날마저 자퇴 서류에 내 성별을 체크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 나는 쉽게 체크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여자라고 적힌 칸에 체크하긴 했지만, 더 이상 죽을 수도 있겠다는 위협은 크게 느끼지 않았지만, 자퇴하고서도 매일 계속해서 파동의 물음에 답해야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트랜스 매스큘린’이라는 단어를 마주했고 그 단어는 내 안의 파동에 형태를 부여했다.
나는 흔들리며 나를 알아갔고, 흔들림 속에서 처음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를 지칭하는 단어를 되새기며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어색하지 않았다. 너무나 마음이 편안했다. 파동이 처음 찾아왔을 때 나는 갑작스러운 파동에 너무나 당황스러웠고 흔들린다는 것은 나쁜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파동을 통해 나는 알게 되었다.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그렇게 파동은 내게 알려주었다.
흔들려도 괜찮다는걸.
[심사위원 작품평]
「파동의 울림」은 사는 동안 혼란, 비정상, 불안, 부정, 어긋남 등 다양한 이름으로 찾아오는 ‘흔들림’에 관한 기록이자 동시에 그 부대낌 속에서도 자신을 지칭할 수 있는 단어를 스스로 발견하고 새기며 “흔들려도 괜찮아” 삶을 긍정하는 과정을 담담히 적은 글입니다. 심사위원들은 고요한 수면 위로 천천히 퍼지는 듯 동심원 같은 린 님의 글을 통해 우리가 ‘평등하게’ 진동하며 파동을 만들어내는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깨쳤습니다.
심사위원 김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