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밤 잠이 들면서, 내가 깨어나면 세상이 달라져 있기를 나는 빌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세상은 그대로였다.”
나의 첫 퀴어 소설 중 한 권인 『아리스토텔레스와 단테, 우주의 비밀을 발견하다』의 첫 장에는 이 다소 무덤덤한 두 문장이 적혀 있다. 외롭고 불확실하고 두렵기 그지없는 나날들을 보내던 내가 단숨에 암기하고 매일같이 읊어대던 두 문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책 속 문구들을 외워 두거나 동네 서점을 내 집처럼 누비고 다니는 나는 오래전부터 또래 아이들에게 ‘소설 덕후’로 이름을 날렸다. 나는 아이돌 포토카드 대신 묵직한 소설을 가방에 넣고 다니고, 화사하게 차려입은 배우의 사진 대신 반듯한 명조체로 적힌 글귀들을 휴대폰 사진첩에 저장해 둔다. 몇몇 소설에 등장하는 사뭇 낯선 영단어들과 사진첩을 뒤지다 보면 보이는 쨍한 색의 무지개들은 내가 이성이 아닌 동성을 좋아한다는 사실의 소소한 증표들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별명을 붙여 줄 때까지만 해도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지만, ‘퀴어’라는 낱말이 등장하는 책들을 쌓아 두고 읽는 나를 보면 인상을 구기거나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학우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낙인찍는 나의 관심사와 성적 지향은 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내가 인문학도의 삶을 꿈꾸게 되기까지의 여정, 그리고 그런 나의 길동무가 되어 준 나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당시에는 나의 감정을 열심히 부인했지만, 처음으로 누군가—그것도 동성을—좋아해 본 것은 고작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였다. 고백과 연애에 대해 한창 호들갑을 떨던 주변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나도 이성을 좋아해 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아주 넌더리가 났다. 자기들이 무슨 대단한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짜증부터 났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래의 내가 비슷한 경험에 대해 이렇게 똑같이 떠들어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같은 학원에 다니던 아이가 나의 첫 번째 짝사랑 상대였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그 아이가 언제부터 친구보다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으로 보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긴 시간 동안 그 아이를 향한 마음 덕분에 모진 고생을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동급생들이 좋아하는 이성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나도 마음속에서 속삭이고 있었고, 나는 그게 정말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무서웠다. 내가 이 나이에 사랑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져도 되는지에 대한 미심쩍음부터, 그게 괜찮다 쳐도 동성에게 마음을 가지는 것에 대한 의문까지. 수많은 자잘한 질문과 갈등에 시달리며 나는 나이를 먹었고, 중학생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학은 내 정체성과 동떨어진 특이한 관심사라고만 생각했다. 지금처럼 문학에 대한 철학조차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돌아보면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어른들은 독서라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며 나를 칭찬했지만, 한창 양산형 판타지 소설과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인물들에 빠져 있던 나에게 소설은 현실의 걱정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남들이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내듯 나도 나만의 텅 빈 독서를 할 뿐이었다. 당시의 나도 이걸 조금은 자각하고 있었는지,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이후로는 내 ‘독서 아닌 독서’를 아예 그만두어 버렸다. 마치 나의 오랜 짝사랑처럼 말이다.
성소수자라는 개념과 LGBTQ+ 커뮤니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마음을 완전히 정리한 지 1년 남짓의 시간이 흘렀을 때, 오랜 친구가 나에게 자신은 양성애자인 것 같다고 커밍아웃한 것이 계기였다. 처음에는 예전 그 아이에게 연심을 품었을 때처럼 혼란스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친구가 이런 경험을 지니고 있었을지, 그리고 왜 하필 나를 믿고 이 이야기를 털어놓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아이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고, 친구가 겪었을 고민의 결이 과거의 나를 괴롭혔던 고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당하게 스스로의 모습을 보여 준 친구를 두고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인터넷을 뒤지기도, 최근 몇 달 동안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책을 들춰 보기도 하며 우리의 고심을 정의하려 애썼다. 곧 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스에서 가끔씩 보이던 무지개 깃발과 의미를 가늠할 수 없던 단어들이 나와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을 줄이야.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자진해서 조사해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도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때 꽃핀 감정은 익숙한 두려움보다는 감격과 뭉클함에 가까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상상하던 동성과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는 삶, 텔레비전 속 성대한 퀴어 퍼레이드를 보며 느꼈던 묘한 동경, 꽉 찬 검색창 앞에서 아른거리는 그 아이의 미소까지. 많고 많은 기억들이 나는 태생적으로 이 새로운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속삭여 주는 것만 같았다.
내가 다시 독서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이때쯤이었다. 컴퓨터 화면뿐만 아니라 익숙한 흰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읽고 싶다는 핑계로 도서관과 서점 따위를 평소보다 자주 방문하게 된 나의 눈에는 원래 찾으러 왔던 비문학 서적보다 자꾸만 표지를 열어 보고 싶게 만드는 소설 제목들이 더 자주 들어왔다. 추억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는 공간에서 나는 다시 문학 작품을 집어들기 시작했다. 우연찮게도, 나는 자료를 찾기 위해 처음으로 서점에 간 날 첫 퀴어 문학 작품들을 만났다. 그날 내용물을 전혀 모른 채 구매한 소설이 총 네 권이었는데, 그중 세 권이 스스로를 퀴어로 정의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었던 것은 아직까지도 황홀하게 생각한다.
그날의 경험은 경이로웠던 만큼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겨 가며 모습을 드러낸 따뜻한 이야기들은 뜻밖의 즐거움으로 내게 다가왔다. 내가 지금까지 감상해 본 문학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감동적인 세 소설을 읽으며, 내가 한때 오랫동안 의지하던 상상 속 세상에서도 드디어 나의 존재를 인정받은 것 같아 진심으로 행복했다.
나에 대해 꾸준히 탐구하고, 나와 친구들의 이야기와 비슷한 양상을 띤 글들을 읽으며 암묵적으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우리는 아직 시스젠더 이성애자들, 즉 다수가 ‘정상’의 기준으로 삼는 이들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소설 속 아이들과 우리 모두 목소리를 낼 용기를 품기 위해 노력하고, 그 용기 덕분에 그토록 원하던 지지와 사랑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믿거나 심지어 존경했던 사람들에게 매몰차게 버림받거나 무시당하는 쓰라린 일을 겪기도 한다. 부모님의 얼굴이 굳는 걸 지켜보고 주변인들의 높은 비웃음을 듣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일이다. 나 역시 가족의 보수적인 가치관과 내 어린 나이에 대한 지인들의 지적, 학우들이 생각 없이 내뱉었을 혐오 발언에 상처받은 경험이 수두룩하다. 아직 동성애자로 완전히 정체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나를 미래에도 계속해서 때려댈 거친 말들과 행동들을 생각하면 절로 입을 닫게 된다.
하지만 나의 감정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만난 작품들을 읽고 또 읽으며 나는 결심했다. 아직 입에는 담기 어려운 우리들의 이야기는 말 대신 글의 형태로 기억하기로. 읽으며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낀 나와 같은 아이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나는 문학이 현실과 단절되어 있기는커녕 오히려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배우게 되었다. “성소수자들에겐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무미건조한 문장도 나를 미소 짓게 하기에 충분하지만, 어려움들을 씩씩하게 극복하며 사랑과 인정을 찾는 퀴어 청소년에 대한 훈훈한 소설을 읽을 때 그 짧은 한 문장을 훨씬 잘 실감할 수 있다. 이처럼 문학은 직설적인 서술이 이끌어내기 어려운 심적인 이해와 동정을 그 무엇보다도 효과적으로 만들어 낸다. 이를 통해 현실에서는 멀게 느껴질 수 있는 나의 혼란이나 남의 경험을 한층 더 흥미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며, 그렇기에 기억될 가치가 있다.
아직 겁 없이 소리쳐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아름다운 우리들의 이야기. 이를 문학의 형태로 쓰고 재창작하고 퍼뜨리는 것이 글을 조금 더 깊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현재의 나의 꿈이다. 과거의 나처럼 방황하는 아이들에겐 “너희는 혼자 걷고 있지 않다”는 위로가, 차별과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에겐 “우리의 경험은 진솔하며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저항이 되어 줄 작품들을 계속해서 읽을 것이고, 기회가 온다면 그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험의 주인공으로서 나만의 이야기도 기록해 보고 싶다.
내년이면 나와 나이가 같아질 퀴어 청소년 아리는 “깨어나면 세상이 달라져 있기를” 빌었다. 하지만 나만큼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환상적인 학문인 문학을 통해 내가,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하루빨리 현실로 만들고 싶고, 나도 나만의 진심 어린 방법을 동원해 그 변화의 일부가 되기로 결심했으니까.
[심사위원 작품평] ‘문학이 어떻게 삶을 위로하고 확장시킬 수 있을까?’ 퀴어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을 단순히 고백하거나 감성적으로 풀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문학을 통해 정체성을 마주하고 복잡한 마음을 글로 기록하며 다져가는 과정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많은 퀴어 청소년들에게 문학이 주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을 수 있어도 덕분에 그 변화는 더 앞당겨질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심사위원 우재 |
“어느 여름밤 잠이 들면서, 내가 깨어나면 세상이 달라져 있기를 나는 빌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세상은 그대로였다.”
나의 첫 퀴어 소설 중 한 권인 『아리스토텔레스와 단테, 우주의 비밀을 발견하다』의 첫 장에는 이 다소 무덤덤한 두 문장이 적혀 있다. 외롭고 불확실하고 두렵기 그지없는 나날들을 보내던 내가 단숨에 암기하고 매일같이 읊어대던 두 문장이기도 하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책 속 문구들을 외워 두거나 동네 서점을 내 집처럼 누비고 다니는 나는 오래전부터 또래 아이들에게 ‘소설 덕후’로 이름을 날렸다. 나는 아이돌 포토카드 대신 묵직한 소설을 가방에 넣고 다니고, 화사하게 차려입은 배우의 사진 대신 반듯한 명조체로 적힌 글귀들을 휴대폰 사진첩에 저장해 둔다. 몇몇 소설에 등장하는 사뭇 낯선 영단어들과 사진첩을 뒤지다 보면 보이는 쨍한 색의 무지개들은 내가 이성이 아닌 동성을 좋아한다는 사실의 소소한 증표들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별명을 붙여 줄 때까지만 해도 나를 아무렇지 않게 대했지만, ‘퀴어’라는 낱말이 등장하는 책들을 쌓아 두고 읽는 나를 보면 인상을 구기거나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학우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낙인찍는 나의 관심사와 성적 지향은 꽤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내가 인문학도의 삶을 꿈꾸게 되기까지의 여정, 그리고 그런 나의 길동무가 되어 준 나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당시에는 나의 감정을 열심히 부인했지만, 처음으로 누군가—그것도 동성을—좋아해 본 것은 고작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였다. 고백과 연애에 대해 한창 호들갑을 떨던 주변 아이들의 눈치를 보며 ‘나도 이성을 좋아해 본 경험이 한 번쯤은 있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아주 넌더리가 났다. 자기들이 무슨 대단한 로맨스 영화나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짜증부터 났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래의 내가 비슷한 경험에 대해 이렇게 똑같이 떠들어대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같은 학원에 다니던 아이가 나의 첫 번째 짝사랑 상대였다.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던 그 아이가 언제부터 친구보다 가까워지고 싶은 사람으로 보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긴 시간 동안 그 아이를 향한 마음 덕분에 모진 고생을 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동급생들이 좋아하는 이성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나도 마음속에서 속삭이고 있었고, 나는 그게 정말 싫었다. 아니, 싫다기보다는 무서웠다. 내가 이 나이에 사랑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져도 되는지에 대한 미심쩍음부터, 그게 괜찮다 쳐도 동성에게 마음을 가지는 것에 대한 의문까지. 수많은 자잘한 질문과 갈등에 시달리며 나는 나이를 먹었고, 중학생이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문학은 내 정체성과 동떨어진 특이한 관심사라고만 생각했다. 지금처럼 문학에 대한 철학조차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으니 돌아보면 내 모습이 우습기만 하다. 어른들은 독서라는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있다며 나를 칭찬했지만, 한창 양산형 판타지 소설과 비현실적이기 짝이 없는 인물들에 빠져 있던 나에게 소설은 현실의 걱정들로부터 나를 구해 주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남들이 인스타그램과 유튜브를 시청하며 시간을 보내듯 나도 나만의 텅 빈 독서를 할 뿐이었다. 당시의 나도 이걸 조금은 자각하고 있었는지, 초등학교 6학년이 된 이후로는 내 ‘독서 아닌 독서’를 아예 그만두어 버렸다. 마치 나의 오랜 짝사랑처럼 말이다.
성소수자라는 개념과 LGBTQ+ 커뮤니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마음을 완전히 정리한 지 1년 남짓의 시간이 흘렀을 때, 오랜 친구가 나에게 자신은 양성애자인 것 같다고 커밍아웃한 것이 계기였다. 처음에는 예전 그 아이에게 연심을 품었을 때처럼 혼란스러운 마음부터 들었다. 친구가 이런 경험을 지니고 있었을지, 그리고 왜 하필 나를 믿고 이 이야기를 털어놓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 아이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고, 친구가 겪었을 고민의 결이 과거의 나를 괴롭혔던 고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당하게 스스로의 모습을 보여 준 친구를 두고 더는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 나는 눈에 불을 켜고 인터넷을 뒤지기도, 최근 몇 달 동안은 거들떠보지도 않던 책을 들춰 보기도 하며 우리의 고심을 정의하려 애썼다. 곧 난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스에서 가끔씩 보이던 무지개 깃발과 의미를 가늠할 수 없던 단어들이 나와 이토록 가까이에 있었을 줄이야.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은 이 모든 것들을 자진해서 조사해 본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도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때 꽃핀 감정은 익숙한 두려움보다는 감격과 뭉클함에 가까웠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상상하던 동성과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는 삶, 텔레비전 속 성대한 퀴어 퍼레이드를 보며 느꼈던 묘한 동경, 꽉 찬 검색창 앞에서 아른거리는 그 아이의 미소까지. 많고 많은 기억들이 나는 태생적으로 이 새로운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속삭여 주는 것만 같았다.
내가 다시 독서에 눈을 뜨게 된 것도 이때쯤이었다. 컴퓨터 화면뿐만 아니라 익숙한 흰 종이에 적힌 글자들을 읽고 싶다는 핑계로 도서관과 서점 따위를 평소보다 자주 방문하게 된 나의 눈에는 원래 찾으러 왔던 비문학 서적보다 자꾸만 표지를 열어 보고 싶게 만드는 소설 제목들이 더 자주 들어왔다. 추억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하는 공간에서 나는 다시 문학 작품을 집어들기 시작했다. 우연찮게도, 나는 자료를 찾기 위해 처음으로 서점에 간 날 첫 퀴어 문학 작품들을 만났다. 그날 내용물을 전혀 모른 채 구매한 소설이 총 네 권이었는데, 그중 세 권이 스스로를 퀴어로 정의하는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작품들이었던 것은 아직까지도 황홀하게 생각한다.
그날의 경험은 경이로웠던 만큼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나를 위로해 주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겨 가며 모습을 드러낸 따뜻한 이야기들은 뜻밖의 즐거움으로 내게 다가왔다. 내가 지금까지 감상해 본 문학 작품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감동적인 세 소설을 읽으며, 내가 한때 오랫동안 의지하던 상상 속 세상에서도 드디어 나의 존재를 인정받은 것 같아 진심으로 행복했다.
나에 대해 꾸준히 탐구하고, 나와 친구들의 이야기와 비슷한 양상을 띤 글들을 읽으며 암묵적으로 깨달은 게 하나 있다. 우리는 아직 시스젠더 이성애자들, 즉 다수가 ‘정상’의 기준으로 삼는 이들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받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소설 속 아이들과 우리 모두 목소리를 낼 용기를 품기 위해 노력하고, 그 용기 덕분에 그토록 원하던 지지와 사랑을 찾아내기도 하지만, 동시에 믿거나 심지어 존경했던 사람들에게 매몰차게 버림받거나 무시당하는 쓰라린 일을 겪기도 한다. 부모님의 얼굴이 굳는 걸 지켜보고 주변인들의 높은 비웃음을 듣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일이다. 나 역시 가족의 보수적인 가치관과 내 어린 나이에 대한 지인들의 지적, 학우들이 생각 없이 내뱉었을 혐오 발언에 상처받은 경험이 수두룩하다. 아직 동성애자로 완전히 정체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나를 미래에도 계속해서 때려댈 거친 말들과 행동들을 생각하면 절로 입을 닫게 된다.
하지만 나의 감정을 인정하는 과정에서 만난 작품들을 읽고 또 읽으며 나는 결심했다. 아직 입에는 담기 어려운 우리들의 이야기는 말 대신 글의 형태로 기억하기로. 읽으며 처음으로 동질감을 느낀 나와 같은 아이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나는 문학이 현실과 단절되어 있기는커녕 오히려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배우게 되었다. “성소수자들에겐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는 무미건조한 문장도 나를 미소 짓게 하기에 충분하지만, 어려움들을 씩씩하게 극복하며 사랑과 인정을 찾는 퀴어 청소년에 대한 훈훈한 소설을 읽을 때 그 짧은 한 문장을 훨씬 잘 실감할 수 있다. 이처럼 문학은 직설적인 서술이 이끌어내기 어려운 심적인 이해와 동정을 그 무엇보다도 효과적으로 만들어 낸다. 이를 통해 현실에서는 멀게 느껴질 수 있는 나의 혼란이나 남의 경험을 한층 더 흥미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해 주며, 그렇기에 기억될 가치가 있다.
아직 겁 없이 소리쳐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제약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아름다운 우리들의 이야기. 이를 문학의 형태로 쓰고 재창작하고 퍼뜨리는 것이 글을 조금 더 깊어진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현재의 나의 꿈이다. 과거의 나처럼 방황하는 아이들에겐 “너희는 혼자 걷고 있지 않다”는 위로가, 차별과 편견을 버리지 못하는 자들에겐 “우리의 경험은 진솔하며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저항이 되어 줄 작품들을 계속해서 읽을 것이고, 기회가 온다면 그 작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경험의 주인공으로서 나만의 이야기도 기록해 보고 싶다.
내년이면 나와 나이가 같아질 퀴어 청소년 아리는 “깨어나면 세상이 달라져 있기를” 빌었다. 하지만 나만큼은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이토록 환상적인 학문인 문학을 통해 내가,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하루빨리 현실로 만들고 싶고, 나도 나만의 진심 어린 방법을 동원해 그 변화의 일부가 되기로 결심했으니까.
[심사위원 작품평]
‘문학이 어떻게 삶을 위로하고 확장시킬 수 있을까?’ 퀴어 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을 단순히 고백하거나 감성적으로 풀어내는 데 그치지 않고, 문학을 통해 정체성을 마주하고 복잡한 마음을 글로 기록하며 다져가는 과정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많은 퀴어 청소년들에게 문학이 주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 같습니다. 세상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 않을 수 있어도 덕분에 그 변화는 더 앞당겨질 것입니다. 온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심사위원 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