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나이얼로 여러 해를 지냈습니다. 퀴어를 혐오했고,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유머로 소비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부끄럽고 후회가 됩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들킬까 봐 은연중에 두려웠던 것도 같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 3월까지 했던 운동부 생활도 그런 생각을 부추기는 데 영향을 줬던 것 같습니다. 그 집단에서 간절히 ‘주류’에 편입되고 싶었습니다. 좋아서 시작한 운동이었고 아직도 거기서의 시간 대부분을 사랑합니다만 그곳에서 제 다양성이 짓밟히고 정해놓은 규격에 완벽히 들어맞기를 매 순간 강요당한 경험은 도무지 사랑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가둬둔 편지의 주인,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건 그렇게 매일 고단하고 가끔 뿌듯한 하루를 보내던 중학교 2학년 늦여름이었습니다.
신기한 친구였습니다. 눈이 아주 크고 동그란 친구. 다른 중학교에서 전학 왔다는 그 친구의 자리는 제 대각선 뒷자리였습니다. 저희는 쉬는 시간마다 만화영화 이야기같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금방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전학을 온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에게 이상한 소문이 따라붙기 시작했습니다. 자해한다더라, 담배를 핀다더라, 강제 전학을 왔다더라, 레즈비언이라더라 등등. 저는 얼굴 없는 소문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믿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두려웠습니다. 혹시나 소문이 사실이라면 내가 나중에 프로선수가 됐을 때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 친구도 제 마음을 알았던 걸까요. 여전히 친하긴 했지만 약간 서먹해진 채로 2학년 생활이 끝났습니다.
그 친구와 저는 3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운동부를 막 나온 상태였습니다. 중학교에 들어온 이래로 처음 주어진 자유를 마음껏 만끽했습니다. 친구와는 같은 동아리도 들어가고 가끔 점심도 같이 먹고 대화도 많이 나누며 여전히 잘 지냈지만 제 눈에는 저희 사이 보이지 않는 거리가 보였습니다.
기말고사 준비가 한창이던 유월의 어느 날, 친구가 저에게 혹시 몇 주 뒤 퀴퍼(퀴어 퍼레이드)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퀴퍼가 뭔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퍼레이드 형식의 성소수자 축제. 그 친구가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오픈으로 지냈기에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또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자각해 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다시 두려워졌습니다. 친구의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지금 생각하자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퀴어들이 모이는 공간에 가면 나도 퀴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을까 겁이 났습니다.
이후로는 그 친구를 자꾸만 피했습니다. 그렇게 방학을 보내고 중학교 3학년 여름에서 가을쯤 완전히 정체화했습니다.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배웠고, 과거의 제 모습을 돌아보며 후회도 자책도 참 많이 했습니다. 잠시 멀어졌던 그 친구와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친하게 지냈습니다. 저희 중 누구도 예전의 일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과거를 덮어놓은 채로 겨울이 왔고 저는 광장에 나가 ‘비주류’인 저와 비슷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차갑지만 참 뜨거웠던 겨울을 나고서야 비로소 저의 전부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제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지냅니다. 그 친구도 제게 소중한 존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제가 차마 책상 서랍 속에서 꺼내지 못한 편지가 어떤 편지인지 짐작이 가실 테지요.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사과의 편지입니다. 제가 제 존재의 밑바닥까지 돌아보며 정체화하고 지금처럼 안정된 마음 상태가 될 때까지의 그 지난한 시간 동안 서운한 티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늘 있던 자리에 있어 준 그 친구에게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 기회를 빌려서라도 말해주고 싶습니다. 한없이 고맙고 미안합니다. 내가 본인을 어떻게 대했든 한결같이 나를 바라봐 주어서, 내 실수를 그냥 넘어가 주어서,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 주어서, 작년 한 해 동안 함께 반짝이는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아주 많이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기에 보고 싶은 그 친구의 얼굴을 올해 1월 졸업식 이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적어도 저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닌가 봅니다.
적당히 즐겁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문득 친구가 떠오릅니다. 그때 저의 행동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지 못한 일이 아직도 제 마음속에 무겁게 남아 있습니다. 혹여나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 사이가 다시 어색해지지는 않을까, 그동안 제 편지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며 건네기를 못내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전해야 할 말에도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듭니다. 집어 든 편지를 친구의 손에 꼭 쥐여주어야 할 시간입니다.
올해 유월에는 제가 먼저 우리 같이 퀴퍼에 가지 않겠냐고 물어볼 계획입니다. 만나서 할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 동안 항상 그쪽에서 먼저 손을 뻗어 왔습니다. 이제는 제 차례입니다. 제가 친구에게로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눈물과 화해로 잡는 최초의 악수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中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의 변용. 우리가 처음 맞잡는 손도 꼭 그렇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한없이 기쁘겠습니다. 네가 옆에 있어서 나는 다시 웃을 수 있었고 네가 옆에 있어서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었어. 부디 내 편지가 너의 우편함에 닿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우리 이번 퀴퍼에는 같이 가지 않을래?”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견유님의 글이 자신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점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체성의 역사 속에서 부끄러움을 딛고 성장하는 과정과 여전히 남겨진 의무를 회피하지 않는 곧은 시선이 인상적인 이 글은, 먼저 다가온 손을 잊지 않고 늦게나마 마주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자 하는 용기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심사위원 현민 |
디나이얼로 여러 해를 지냈습니다. 퀴어를 혐오했고, 성소수자들의 존재를 유머로 소비하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부끄럽고 후회가 됩니다. 제가 어떤 사람인지 들킬까 봐 은연중에 두려웠던 것도 같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 3월까지 했던 운동부 생활도 그런 생각을 부추기는 데 영향을 줬던 것 같습니다. 그 집단에서 간절히 ‘주류’에 편입되고 싶었습니다. 좋아서 시작한 운동이었고 아직도 거기서의 시간 대부분을 사랑합니다만 그곳에서 제 다양성이 짓밟히고 정해놓은 규격에 완벽히 들어맞기를 매 순간 강요당한 경험은 도무지 사랑할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가둬둔 편지의 주인, 그 친구를 처음 만난 건 그렇게 매일 고단하고 가끔 뿌듯한 하루를 보내던 중학교 2학년 늦여름이었습니다.
신기한 친구였습니다. 눈이 아주 크고 동그란 친구. 다른 중학교에서 전학 왔다는 그 친구의 자리는 제 대각선 뒷자리였습니다. 저희는 쉬는 시간마다 만화영화 이야기같이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금방 친해졌습니다. 그런데 전학을 온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에게 이상한 소문이 따라붙기 시작했습니다. 자해한다더라, 담배를 핀다더라, 강제 전학을 왔다더라, 레즈비언이라더라 등등. 저는 얼굴 없는 소문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믿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두려웠습니다. 혹시나 소문이 사실이라면 내가 나중에 프로선수가 됐을 때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 친구도 제 마음을 알았던 걸까요. 여전히 친하긴 했지만 약간 서먹해진 채로 2학년 생활이 끝났습니다.
그 친구와 저는 3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운동부를 막 나온 상태였습니다. 중학교에 들어온 이래로 처음 주어진 자유를 마음껏 만끽했습니다. 친구와는 같은 동아리도 들어가고 가끔 점심도 같이 먹고 대화도 많이 나누며 여전히 잘 지냈지만 제 눈에는 저희 사이 보이지 않는 거리가 보였습니다.
기말고사 준비가 한창이던 유월의 어느 날, 친구가 저에게 혹시 몇 주 뒤 퀴퍼(퀴어 퍼레이드)에 같이 가지 않겠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저는 퀴퍼가 뭔지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퍼레이드 형식의 성소수자 축제. 그 친구가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는 오픈으로 지냈기에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또 제가 어떤 사람인지 점점 자각해 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다시 두려워졌습니다. 친구의 소문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지금 생각하자면 한심하기 짝이 없습니다만 퀴어들이 모이는 공간에 가면 나도 퀴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을까 겁이 났습니다.
이후로는 그 친구를 자꾸만 피했습니다. 그렇게 방학을 보내고 중학교 3학년 여름에서 가을쯤 완전히 정체화했습니다.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배웠고, 과거의 제 모습을 돌아보며 후회도 자책도 참 많이 했습니다. 잠시 멀어졌던 그 친구와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친하게 지냈습니다. 저희 중 누구도 예전의 일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과거를 덮어놓은 채로 겨울이 왔고 저는 광장에 나가 ‘비주류’인 저와 비슷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차갑지만 참 뜨거웠던 겨울을 나고서야 비로소 저의 전부를 사랑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제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지냅니다. 그 친구도 제게 소중한 존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제가 차마 책상 서랍 속에서 꺼내지 못한 편지가 어떤 편지인지 짐작이 가실 테지요. 그 친구에게 미안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사과의 편지입니다. 제가 제 존재의 밑바닥까지 돌아보며 정체화하고 지금처럼 안정된 마음 상태가 될 때까지의 그 지난한 시간 동안 서운한 티 한 번 내지 않고 묵묵히 늘 있던 자리에 있어 준 그 친구에게 정말로 고맙습니다. 이 기회를 빌려서라도 말해주고 싶습니다. 한없이 고맙고 미안합니다. 내가 본인을 어떻게 대했든 한결같이 나를 바라봐 주어서, 내 실수를 그냥 넘어가 주어서, 오랫동안 나를 기다려 주어서, 작년 한 해 동안 함께 반짝이는 추억들을 많이 만들어 주어서. 고맙습니다. 아주 많이 고맙습니다. 그리고 미안합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기에 보고 싶은 그 친구의 얼굴을 올해 1월 졸업식 이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몸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적어도 저에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닌가 봅니다.
적당히 즐겁고 무료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문득 친구가 떠오릅니다. 그때 저의 행동에 대해 제대로 사과하지 못한 일이 아직도 제 마음속에 무겁게 남아 있습니다. 혹여나 괜히 이야기를 꺼냈다가 사이가 다시 어색해지지는 않을까, 그동안 제 편지를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며 건네기를 못내 망설였습니다. 하지만 전해야 할 말에도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더 이상 늦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듭니다. 집어 든 편지를 친구의 손에 꼭 쥐여주어야 할 시간입니다.
올해 유월에는 제가 먼저 우리 같이 퀴퍼에 가지 않겠냐고 물어볼 계획입니다. 만나서 할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 동안 항상 그쪽에서 먼저 손을 뻗어 왔습니다. 이제는 제 차례입니다. 제가 친구에게로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눈물과 화해로 잡는 최초의 악수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中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의 변용. 우리가 처음 맞잡는 손도 꼭 그렇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한없이 기쁘겠습니다. 네가 옆에 있어서 나는 다시 웃을 수 있었고 네가 옆에 있어서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었어. 부디 내 편지가 너의 우편함에 닿기를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우리 이번 퀴퍼에는 같이 가지 않을래?”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견유님의 글이 자신에 대한 성찰을 기반으로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표현한 점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체성의 역사 속에서 부끄러움을 딛고 성장하는 과정과 여전히 남겨진 의무를 회피하지 않는 곧은 시선이 인상적인 이 글은, 먼저 다가온 손을 잊지 않고 늦게나마 마주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자 하는 용기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심사위원 현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