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논바이너리이자, 무성애 스펙트럼의 오토코리스 로맨틱이다. 성별을 딱히 정하지 않고, 연애소설 같은 로맨틱한 상황은 즐기지만 그 당사자가 되길 원하지 않는 로맨틱이다. 언제였을까, 엄마한테 논바이너리 관련 이야기를 꺼낸 적 있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논바이너리? 그거 성별 없는 건데?”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나는 내가 논바이너리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몇 년 정도를 여자로 살아왔다.
하지만 몇 년이 더 지나, 몇 번의 계절을 거쳐서 나는 내가 여자이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성별 위에 내가 있길 바란다. 내가 여자, 여성이 아닌 상이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남들 앞에서 내가 논바이너리라고, 오토코리스 로맨틱이라고 말하지를 못한다.
14살, 아직 많이 어린 나이이다. 자신과 남을 존중하기란 아직은 조금은 어려운 나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성별 정체성과, 로맨틱 지향을 밝히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이야기를 하면 정말 빨리 퍼져나가는데. 그게 학교이고 교실이란 곳인데, 나는 그런 곳에서 부풀리고 과장되어 나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소문이란 걸 감당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반에서 자기 여자친구와 남자친구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부러운 척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밝힌다면 얼마나 퍼져나갈지 모른다. 적어도 내가 이런 일을 겪게 되고 학교에 가는 걸 어렵게 생각한다면 주변 어른들마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 집은 퀴어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 동생은 여전히 동성애자를 놀리는 용도로 사용한다. 엄마는 연애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그래서 전에는 동성애자 관련 연애 프로그램을 보는 건 어떻냐고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손사래를 치셨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무지개이고 퀴어라는 걸 말하기에는 엄청나게 힘들다. 나는 무지개이자 가시광선이지만, 빛을 보였다간 큰일 날 수 있으니 구름으로 감싸는 거다. 여자라는 구름을 쓰고,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나아가고 있다. 아주 작은 것 같은 한 걸음이지만, 천천히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변화의 물결을 향해서.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언젠가 자유롭고 떳떳하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논바이너리라고, 내가 오토코리스 로맨틱이라고.
하지만 아직 현실은 그러지 못한다. 얼마 전, 양성평등 교육을 배웠던 걸 기억한다. 양성평등 교육에선 여자와 남자, 두 성은 모두 평등하고 성역할 고정관념은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나 같은 논바이너리는 어떡하지, 싶었다. 논바이너리뿐만이 아니다, 젠더퀴어나 트렌스젠더는? 그런 우리는 평등하지 못하고 낮은 존재인 건가 싶었다. 영상에선 이렇게 말했다. 의사를 생각하면 어떤 사람이 떠오르냐고. 다들 보통 중년 남성으로 생각하겠지만 만약 다른 여성 의사 같은 사람이 진료를 한다고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성역할 고정관념이고 우리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고.
그런데 어째서 그 교육에선 트렌스젠더 의사는 나오지 않는가? 젠더퀴어 의사는 나오지 않는가? 논바이너리 의사는 나오지 않는가? 그것은 그거대로 차별이 아닌가. 만약 나중에, 트렌스젠더 의사나 젠더퀴어 의사, 논바이너리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다면 전문적이지 않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분법에 따른 성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은 이분법에 따른 의사는 믿을 것이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우리에 대한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다. 차별철폐 교육이 또 다른 차별을 낳은 것이다.
나는 수업을 정상적으로 들을 수 없었다. 차별을 없애겠다면서 한 교육이지만 양성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 우리는 양성으로 나누어지고 우리는 양성이어야만 하고 양성이 평등하다는 교육을 듣는가. 여기 양성이 아닌 사람이 있는데도 말이다. 나의 마음이 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 어떤 반 친구가 질문했다. 영상에 나왔던 젠더가 무슨 단어냐고. 그 순간, 깨어지던 내 마음이 다시 붙을 것만 같았다. 도덕 선생님은 사회적 성별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 마음속에 불이 붙었다. 나는 말을 했다. 젠더는 사회적 성이라고, 트렌스젠더나 논바이너리처럼 여자나 남자가 아닌 성이라고. 그렇게 설명을 했다. 그 아이가 다시 질문했다. 트랜스 젠더 관련 질문이었다. 나는 트랜스젠더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이번엔 내 앞자리에 있는 애가 질문을 했다. 자기가 성별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건 뭐냐고. 그건 나는 논바이너리로 설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젠더리스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조금 기뻤기에 생각을 못 했나 보다. 지금까지 아주 천천히 가던 달팽이가 이번에는 육지거북의 속도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이 너무 기뻤다. 우리 교실의 작은 변화였다. 도덕 선생님은 나의 설명을 잘했다고 해 주셨다.
그 순간, 부서진 마음이 붙었다. 도자기 깨진 것처럼 박혀 나에게 아픈 혼란을 남기던 교육이, 아이들의 긍정적인 궁금증으로 저 멀리서 보던 사회의 변화 가능성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무지개를 구름으로 감싸 책상 밑에 넣어놓는다. 그리고 언젠가 말이다, 아주 언젠가. 우리들의 무지개가 자유로울 때, 하늘에 자유로이 떠 있는 무지개가 더욱 많아질 때, 다름을 인정받고 모두가 평등하다고 인정할 때, 나는 그때야 나의 무지개를 하늘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로 남기로 원하고, 아무와도 연애감정을 품지 않고 사회가 강요하지 않을 때, 성별이 두 개가 아니라 더 많은 성별이 인정받고 이분법이 없어질 때, 손에 꽉 쥐어 숨기던 무지개를 놓을 때, 내 마음이 흉터와 스크래치 하나 없을 때 말이다. 그때야 자유롭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 작품평] 사람들은 자연 현상인 하늘에 떠오른 무지개를 반깁니다. 하지만 같은 자연 현상인 사람들 속 무지개는 반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이님의 말처럼 누군가는 자신의 무지갯빛을 구름을 씌워 꽁꽁 감춰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조금씩 천천히 나아지고 있습니다. 상이님이 글로 전한 교실의 작지만 유의미한 변화가, 구름 한 점 없는 무지갯빛 하늘을 만끽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밀알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글을 용기 내어 세상에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오세진 |
나는 논바이너리이자, 무성애 스펙트럼의 오토코리스 로맨틱이다. 성별을 딱히 정하지 않고, 연애소설 같은 로맨틱한 상황은 즐기지만 그 당사자가 되길 원하지 않는 로맨틱이다. 언제였을까, 엄마한테 논바이너리 관련 이야기를 꺼낸 적 있다.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논바이너리? 그거 성별 없는 건데?”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던 나는 내가 논바이너리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몇 년 정도를 여자로 살아왔다.
하지만 몇 년이 더 지나, 몇 번의 계절을 거쳐서 나는 내가 여자이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성별 위에 내가 있길 바란다. 내가 여자, 여성이 아닌 상이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는 남들 앞에서 내가 논바이너리라고, 오토코리스 로맨틱이라고 말하지를 못한다.
14살, 아직 많이 어린 나이이다. 자신과 남을 존중하기란 아직은 조금은 어려운 나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성별 정체성과, 로맨틱 지향을 밝히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내 이야기를 하면 정말 빨리 퍼져나가는데. 그게 학교이고 교실이란 곳인데, 나는 그런 곳에서 부풀리고 과장되어 나를 잡아먹을지도 모르는 소문이란 걸 감당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이 반에서 자기 여자친구와 남자친구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는 부러운 척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밝힌다면 얼마나 퍼져나갈지 모른다. 적어도 내가 이런 일을 겪게 되고 학교에 가는 걸 어렵게 생각한다면 주변 어른들마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른다.
더군다나 우리 집은 퀴어에 대한 인식이 그렇게 좋지는 않은 것 같다. 우리 동생은 여전히 동성애자를 놀리는 용도로 사용한다. 엄마는 연애 프로그램을 좋아한다. 그래서 전에는 동성애자 관련 연애 프로그램을 보는 건 어떻냐고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손사래를 치셨다. 이런 환경에서 내가 무지개이고 퀴어라는 걸 말하기에는 엄청나게 힘들다. 나는 무지개이자 가시광선이지만, 빛을 보였다간 큰일 날 수 있으니 구름으로 감싸는 거다. 여자라는 구름을 쓰고,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이 세계는 나아가고 있다. 아주 작은 것 같은 한 걸음이지만, 천천히 천천히 나아가고 있다. 달팽이가 기어가는 것처럼. 변화의 물결을 향해서. 그런 날이 온다면 나는 언젠가 자유롭고 떳떳하게 외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논바이너리라고, 내가 오토코리스 로맨틱이라고.
하지만 아직 현실은 그러지 못한다. 얼마 전, 양성평등 교육을 배웠던 걸 기억한다. 양성평등 교육에선 여자와 남자, 두 성은 모두 평등하고 성역할 고정관념은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 나 같은 논바이너리는 어떡하지, 싶었다. 논바이너리뿐만이 아니다, 젠더퀴어나 트렌스젠더는? 그런 우리는 평등하지 못하고 낮은 존재인 건가 싶었다. 영상에선 이렇게 말했다. 의사를 생각하면 어떤 사람이 떠오르냐고. 다들 보통 중년 남성으로 생각하겠지만 만약 다른 여성 의사 같은 사람이 진료를 한다고 별로 좋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성역할 고정관념이고 우리는 성역할 고정관념을 없애야 한다고.
그런데 어째서 그 교육에선 트렌스젠더 의사는 나오지 않는가? 젠더퀴어 의사는 나오지 않는가? 논바이너리 의사는 나오지 않는가? 그것은 그거대로 차별이 아닌가. 만약 나중에, 트렌스젠더 의사나 젠더퀴어 의사, 논바이너리 의사에게 진찰을 받는다면 전문적이지 않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분법에 따른 성이 아니니까. 하지만 그 사람들은 이분법에 따른 의사는 믿을 것이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으니까. 하지만 우리에 대한 내용은 그 어디에도 없다. 차별철폐 교육이 또 다른 차별을 낳은 것이다.
나는 수업을 정상적으로 들을 수 없었다. 차별을 없애겠다면서 한 교육이지만 양성이라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왜 우리는 양성으로 나누어지고 우리는 양성이어야만 하고 양성이 평등하다는 교육을 듣는가. 여기 양성이 아닌 사람이 있는데도 말이다. 나의 마음이 깨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때 어떤 반 친구가 질문했다. 영상에 나왔던 젠더가 무슨 단어냐고. 그 순간, 깨어지던 내 마음이 다시 붙을 것만 같았다. 도덕 선생님은 사회적 성별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내 마음속에 불이 붙었다. 나는 말을 했다. 젠더는 사회적 성이라고, 트렌스젠더나 논바이너리처럼 여자나 남자가 아닌 성이라고. 그렇게 설명을 했다. 그 아이가 다시 질문했다. 트랜스 젠더 관련 질문이었다. 나는 트랜스젠더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이번엔 내 앞자리에 있는 애가 질문을 했다. 자기가 성별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건 뭐냐고. 그건 나는 논바이너리로 설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젠더리스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조금 기뻤기에 생각을 못 했나 보다. 지금까지 아주 천천히 가던 달팽이가 이번에는 육지거북의 속도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이 너무 기뻤다. 우리 교실의 작은 변화였다. 도덕 선생님은 나의 설명을 잘했다고 해 주셨다.
그 순간, 부서진 마음이 붙었다. 도자기 깨진 것처럼 박혀 나에게 아픈 혼란을 남기던 교육이, 아이들의 긍정적인 궁금증으로 저 멀리서 보던 사회의 변화 가능성이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무지개를 구름으로 감싸 책상 밑에 넣어놓는다. 그리고 언젠가 말이다, 아주 언젠가. 우리들의 무지개가 자유로울 때, 하늘에 자유로이 떠 있는 무지개가 더욱 많아질 때, 다름을 인정받고 모두가 평등하다고 인정할 때, 나는 그때야 나의 무지개를 하늘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나로 남기로 원하고, 아무와도 연애감정을 품지 않고 사회가 강요하지 않을 때, 성별이 두 개가 아니라 더 많은 성별이 인정받고 이분법이 없어질 때, 손에 꽉 쥐어 숨기던 무지개를 놓을 때, 내 마음이 흉터와 스크래치 하나 없을 때 말이다. 그때야 자유롭고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 작품평]
사람들은 자연 현상인 하늘에 떠오른 무지개를 반깁니다. 하지만 같은 자연 현상인 사람들 속 무지개는 반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이님의 말처럼 누군가는 자신의 무지갯빛을 구름을 씌워 꽁꽁 감춰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조금씩 천천히 나아지고 있습니다. 상이님이 글로 전한 교실의 작지만 유의미한 변화가, 구름 한 점 없는 무지갯빛 하늘을 만끽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밀알이 되길 바랍니다. 그런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글을 용기 내어 세상에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심사위원 오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