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무지개백일장 수상작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것들 / 이정준, 2008년생, 나다움상

 그 애가 꿈에 나왔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나 거지 같은 타이밍에 이렇게나 미화된 모습으로 나오는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꿈에는 소리가 없었다. 나는 직접 대화해본 적이 없는 사람의 목소리를 떠올리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다니는 고등학교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그곳은 책상도 칠판도 선생님의 원피스도 셔츠의 색깔도 전부 하얀 곳이었다. 의자는 파랗고 창문은 투명했겠지.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 비슷한 풍경이었다. 그렇지만, 정말 그곳인 건 아니었다. 어느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흰색으로 뒤섞인 장면들 속에 남은 것은 이미지뿐이다. 나는 왼쪽의 창가 뒷자리에 앉아 있고 그 애는 나에게서 옆으로 세 줄 정도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다. 적어도 내 모교의 이미지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이 공간이라면, 마커를 문지를 때 ‘삑삑’ 소리가 나는 화이트보드에는 흐린 글씨가 적혀야 하고, 하얀 모든 것들은 쉽게 더러워져 가볍기만 한 느낌을 주어야 한다. 그때 창밖으로부터 자연광이 들어온다. 그것은 그 애의 하얀 옆얼굴을 비춘다. 그러자 교실 전체가 가벼움에서 어떤 무거움으로, 섬세함으로, 영화적임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그 애의 얼굴이 뜨거워 보이지는 않으므로 이 장면은 서늘해진다. 그 애는 미동도 없이 교과서를 들여다보고 있다.

 다음 장면에서 그 애는 내 옆에 있다. 짝꿍. 중학교 시절에는 코로나 때문에 책상을 붙여 앉을 수 없었거니와 남중 남고에서 짝꿍이란 것은 아이들에게 별 의미를 갖지 않았었는데. 같은 학년이 되어서 함께 수업을 듣는다는 것도 심장 떨리는 일인데, 이 순간 옆에 있다. 꾸벅꾸벅 조는 그 애의 눈이 보고 싶어서 고개를 살짝 숙인다. 감겨있을 줄 알았던 눈은 게슴츠레 뜨여 내 쪽을 보고 있다. 나를 본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 애는 무정하리만치 가만히 눈을 돌려버린다. 동요하지 않는 얼굴을 끝으로 꿈은 끊어졌다.

 그만두자, 라고 생각하게 된 바로 그날 밤에 꾼 꿈이었다. 그만두기로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꿈을 꾸었다는 사실 자체로 행복해했겠지. 혹은 이런 꿈을 꾸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나름의 타당한 해석을 내놓을 수가 있게 된다. 이것은 현실에 대한 무참한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그 애는 내가 아는 모습 그대로 나온다. 거리는 가까우나 무엇도 다르지 않다. 그나마 아는 일면의 깊은 데로도 들어갈 수 없고, 다른 면면을 알 수도 없고, 옆모습으로만 존재하는. 꿈은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허무를 보여주었다. 뽀얀 공기 같은 절망을.

 

 이렇게 아름다운 꿈을 꾼 것에 대해 나는 또 분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름다워서, 잘 잊을 수 없는 것이 될 테니까. 나는 흘러갈 수 있을 것인가, 흘러간다면 얼마나 흘러가야 하는 것인가. 이다음은 있는 것일까. 눈을 뜨자 관에 갇혀있음을 깨달은 사람처럼 나는 무의미한 질문들을 매 순간 던져댔다. 그런 사람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해 논리적으로 사고할 능력을 지녔고 정확한 판단을 위해 정신을 차리고자 끊임없이 노력할 줄도 안다. 그렇지만 그는 시간을 모른다. 자신이 묻힌 깊이를 모른다.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으므로 고등학생의 테두리 바깥에 놓인 세상을 질투하게 되었다.

 

 아직 그 애를 놓기로 마음먹지 않았던 때, 글을 여러 차례 쓰고 고치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그 애를 좋아하는 일이 나에게 가르쳐준 감정이나 대체재들을 열거하려다가, 어떤 결론에도 다다르지 못한 채 글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것들은 결국 나의 착각이었을 테니까. 사실 나는 처음부터 혼자였을 테니까. 일기와 생각은 하나같이 발생하자마자 흩어지는 독백이 되고, 의지는 나아감 없이 맴돌고. 나는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짝사랑의 끝까지 가면 뭐가 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의미를 찾아내려고 버둥댔지만 종당에는 전부 없음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장장 팔 개월, 이렇게 긴 짝사랑은 처음이었으니까 마음이 많이 아팠었고 그럼에도 떠나지 못한 이유는 명백했다. 나는 망상에 절어있는 사람이니까. 누구나 사실은 그런 것이고, 누구나 얼마간은 긴가민가해하며 지레짐작하고 그러는 것이고, 내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용기인 것이라는 말들이 머릿속에 떠다녔다. 그건 모두 쓸모없었다. 오랫동안 나는 절망해 왔고, 자책해 왔고, 지금은 대한민국의 고3이고, 작곡 전공이고, 입시를 목전에 두었고, 방해물들을 적극적으로 끊어내야 한다.

 그런 스스로를 위해서였을까, 망상이 점차로 깨졌다. 가능성의 늪에서 조금씩 기어 나온다. ‘혹시’, ‘설마’, 그리고 매일의 가장 사소한 희망. 그런 일그러진 욕망으로부터 적극적으로 벗어나려고 하게 된다. 나는 내가 그렇게 하기로 결심한 듯 말하지만, 사실 그것은 결단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다만, 그렇게 되어버리는 일이다. 망상이 왜 깨졌는지 알 길은 없으므로.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의 얼굴을 사랑하고, 과묵함을 사랑하고, 열의를 사랑하고, 웃음을 사랑한다. 그런 비약을 맛보았지만 스스로가 얼마나 비뚤어진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잴 수가 없었다. 비뚤어진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 묻고 싶었다. 그렇지만 누구에게? 물음에 답해줄 사람은 거의 없었다. 경험이 없어서 스스로에게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내 망상 속의 정제된 말들과 몸짓들은 태생적인 막연함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글을 고치고 다시 쓰면서, 나는 짝사랑을 하는 동안에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지만 그것이 사랑 덕분이라고, 남자아이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음을 느꼈다.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혼자서 아플 대로 아픈 덕분일 테다. 사랑 안에서 그것들은 오히려 공허한 것이 되어버리곤 했지.

 그렇다고 제목을 ‘내가 스스로에게 알려준 것’이라고 지을 것인가? 거기에는 진전이 없다. 다만, 그곳에 절망과 자멸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답답한 두려움이 있다. 영원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이 있다.

 

 꿈을 꾼 날, 한눈팔지 않으려다 바닥을 보았다. 적극적으로 동화되어 날카로운 것을 들었다. 며칠 뒤 보건실에 들렀는데 상처를 보여줘야만 한다고 해서 자포자기로 고백했다. 상담 선생님과 상담했고, 아빠는 자해 사실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날 저녁 나는 아빠를 크게 적대시했다. 나는 내가 너무 오랫동안 제자리에서 힘들어했고, 그 짓을 그만두려다가 이런 불건전하고 위험한 해소 방법을 택하기도 했다는 사실에 대한 무조건적인 위로를 바랐다. 아빠는 그런 방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여러 부분에서 세대 차이를 실감했고, 아빠는 나의 성적 지향이 나의 것이기 때문에 존중하고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지 여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는 얘길 했다. (우리는 영영 불가해한 존재들이어서 단지 서로를 인정할 뿐임을 나 또한 안다.) 또 작은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날의 결론은 방과 후에 야자실이 아닌 스터디카페에서 공부하자는 것으로 되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나. 알고 있다. 지난 겨울방학 때 실감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포기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므로 그 뻔한 격언(?)을 실행에 옮겨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다음 날 나는 이상할 만큼 멀쩡할 수 있었다. 멀쩡하지 않던 지난날로부터의 해방감이 끼쳐왔다. 끝없이 어리석은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라면, 팔 개월 간의 나는 지나치게 인간적이었다. 그러나 어떤 시인의 문장처럼 나와 우리는 ‘비인간’이어서, 뭔가를 향해 가지 않으면 이내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이다.

 

 자신을 똑바로 보기. 삶을 가꾸기. 연대하기. 자책 않기. 일기 쓰고 책 읽기. 나는 미련 위를 기어가는 일이 세계에 대한 관점을 넓혔음을 인정한다. 다만 어른이 되려는 그런 욕망을 알려준 것은 누구일까. 나 자신의 태생? 엄마와 아빠? 몇 없는 친구들? 내면의 문제를 건드려준 J 누나? 내가 나를 끈질기게 붙잡도록 한 그 애?

 아, 끼워 맞추는 건 싫어. 내 삶을 이루는 것들을 그저 어쩌다 보니 알게 된 것 정도로 취급해야겠다. (‘삶이 내게 알려준 것‘이라는 제목마저도 지나치다.) 어떤 내러티브도 드라마도 생기지 않는 이 시대의 이 삶에서, 나는 어디론가 흘러가야겠다. 오늘인지 내일인지 알 수 없는 앎과 깨달음의 총합 사이에서 어지러이 끄적여야겠다. 음악을. 글을. 또 다른 곳에서 만날 사랑의 새로움을.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이정준님의 글이 꿈과 현실의 여러 단면을 섬세한 문체로 그려낸 점이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로는 삶을 관조하고, 때로는 치열하게 살아냄으로써 함부로 규정해서는 안 되는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 인상적인 이 글은, 어떠한 틀에 끼워 맞추지 않아도 우리의 삶이 여기에 존재함을 드러내는 의지를 우리에게 전합니다.

심사위원 현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