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무지개백일장 수상작

디어 마이 / 영, 2008년생, 나다움상

언니, 안녕. 나야.


언니의 색 빠진 금발을 자주 떠올려. 손바닥 길이만큼 자란 검은 뿌리도. 내가 사겠다는 팝콘을 만류하며 숨 가쁘게 뛰어왔는지 약간은 헐떡이는 채로 나를 보고 웃던 그 얼굴, 언니가 그 날 입었던 검정 원피스와 뒤로 메는 은색 버킷백까지. 아, 언니가 한발 늦는 바람에 팝콘값은 내가 결제할 수 있었어. 언니는 영화를 보고 나서 간 카페 음료값을 언니가 내야만 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난 못 이기는 척 언니에게 따랐었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가 될 줄은 몰랐네. 물론 데이트라는 명칭은 내가 멋대로 갖다 붙인 거지만. 그럴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더 준비하고 나갔을 텐데. 언니가 “이 책 알아?”하고 묻는 질문에 하나라도 대답할 수 있게. 언니는 늘 그랬는데. 내가 어떤 책이나 영화에 관해 물으면, “아, 알지”하고 예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날 언니는 내가 본 처음으로 휴대폰을 가지고 나왔어. 늘 태블릿으로나 연락을 확인하던 언니가 말이야. 자랑스러운 듯 “내가, 휴대폰을 가지고 나왔어”하고 말하던 언니 목소리가 기억나. 노란색 케이스를 끼우고 있었지. 그 케이스 뒤에 있던 캐릭터가 뭐였는지는 잊어버렸다. 


박상영을 읽을 때마다 언니 생각이 나. 요즘은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고 있는데, 거기에 이런 문장이 나오더라. 


‘나의 정치적인 무지가 부끄러웠다기보다는 (그딴 걸 부끄러워해 본 적은 없으므로) 그가 멍청하고 생각 없는 내 본연의 모습에 질색할까 봐, 그래서 다시는 나를 봐주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나는 영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어. 언니랑 있을 때, 언니가 내게 좋아하는 책과 영화에 대해 말할 때 늘 그랬거든. 묻는 족족 “아니, 몰라”하고 대답하는 내가 늘 불안했어. 언니가 ‘멍청하고 생각 없는 내 본연의 모습에 질색할까 봐’. 그래서 언니와 멀어진 지금은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 같기도 해. 물론 친구와 웃으며 복도를 걸어가는 언니를 볼 때면 복잡한 감정에 휩싸이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지속적이지 않으니까. 


염색했더라. 붉은 기가 도는 채도 낮은 분홍색. 내가 알던 언니의 모습이 백일몽처럼 느껴져. 내가 처음으로 본 언니는 백색에 가까운 밝은 금발이었어. 많이 무뚝뚝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는데, 색이 빠질 무렵에야 언니가 내게 흥미를 가졌던 듯해. 두발 규제가 없음에도 온통 검은 머리카락뿐인 이 학교에서, 신입생인 내 붉은 머리가 눈에 띄어서였을까. 아니면 같은 방과 후 수업을 듣는 것도 모자라 같은 동아리에까지 소속되어 있다는 걸 자각해서였을까. 하긴, 나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거야. 언니는 그런 사람이니까. 한 뼘 거리만큼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도, 고개를 들어보면 저 멀리 뒤돌아 가고 있는. 앞으로 내가 언니의 웃는 얼굴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아. 


아, 그날 봤던 영화 얘기를 빼놓을 수가 없겠네. 제목 기억해? ‘비틀쥬스 비틀쥬스.’ 지금껏 살면서 언니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 그런 언니와 함께 팀 버튼을 본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어. 심지어 언니는 한참을 고민하다 보낸 내 메시지에 바로 답장해 줬으니까. 영화가 시작하기 전 광고가 나오는 스크린 앞에 앉아서, 언니는 내게 어떤 영화를 제일 좋아하느냐고 물었어. 나는 잠깐 고민하다 ‘꿈의 제인’이라고 답했지. “상업 영화 중에는?” 나는 또 한참을 고민했어. 이창동 감독과 팀 버튼, 존 카메론 미첼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지만 그날 보기로 한 영화 때문이었을까. 나는 ‘가위손’이라고 답했어. “언니는?” “나는 아이언맨.” 우리는 말없이 팝콘을 집어 먹으며 영화를 봤어. 친구랑 둘이 갔을 때는 라지 사이즈 팝콘을 시켜서 다 먹었는데, 점심을 안 먹고 나왔다던 언니랑은 반 이상을 남기더라. “어땠어?” “되게 팀 버튼 같았어.” 언니가 물었고, 내가 대답했어. 상영관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 때, 언니가 문득 다시 말했어. “근데 그 말, 진짜 맞는 것 같아. 팀 버튼스러웠다는 말.” 


영화를 보고 카페를 향해 걷는 길에는 해가 지고 있었어. 언니가 하늘이 예쁘다는 말을 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언니는 언니 이름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어. 카페에 도착해 나는 자몽 에이드를, 언니는 청포도 음료를 주문했던 것 같아. 언니는 파란색을 좋아하고, 사막에는 사랑하는 것들이 없어서 가고 싶지 않다고 했었지. “너는 있잖아. 사막에 사랑하는 것.” 언니가 말한 건 아마 선인장이었을 거야. 언니는 내 생일 선물로 선인장 키링을 사 뒀다고 했어. 그건 거짓말이었나 봐. 왜냐하면, 생일로부터 석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언니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못했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기대한 건 생일 선물이 아니라 ‘언니가 주는’ 무언가였어. 그게 찢어진 시집 한 장이었다고 해도 내겐 소중했을 텐데. 사 뒀다는 게 거짓말이 아니라 줄 마음이 없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방금 들었어. 


내가 언니에게 뭔가를 잘못한 걸까. 우리는 참 잘 맞는다고, 어쩌면 운명일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했었어. 내가 이상을 좋아한다는 말에 환해지던 언니 표정을 보고. 아니, 자신도 이상을 좋아한다며, 그와 생일마저 같다며 웃던 언니의 얼굴을 보고.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너무 똑같아서 무섭다던 언니의 말을 듣고. 하나가 사라져도 남은 하나가 사라진 하나의 몫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그 농담을 듣고. 난 언니를 아주 많이 원망하고 있어. 내가 한때 사랑했던 언니의 자유로움을, 완고함을 원망하고 있어. 내가 말했던 책들을 언니는 모두 읽어봤다고 했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파과, 그리고 그 외의 다른 것들. 내가 동아리 공연 도중에 보았던 책들을 이야기했더니, 언니는 화들짝 놀라며 “그거 내 거 같은데”하고 말했어. 언니네 동아리 공연의 다음 공연이 우리 동아리였기 때문이어서겠지. “‘파과’도 있었어.” “어, 그것도.” “‘너무나 많은 여름이’ 는?” “그것도 내 건데?” 우리는 깔깔 웃었어. 언니는 김연수와 구병모, 김애란, 기형도를 추천했어. 해외 문학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도스토옙스키, 다니자키 준이치로, 알베르 카뮈,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적어두고 보니까 엄청 많네. 이 중 내가 정말로 읽은 책은 김연수뿐이라는 사실이 언니를 화나게 한 걸까. 잘 모르겠어. 언니는 언니가 추천한 김연수의 책에 갈피를 끼워 동아리 시간에 가져갔을 때, ‘어’하고는 눈을 가늘게 뜨며 웃어줬거든. 


언니는 종이책보다는 전자책을 많이 읽는다는 걸, 그날 카페에서 들었어. “난 전자책은 집중이 잘 안 되던데. 그래서 종이책을 조금 더 선호해.” “나도 그랬는데, 언젠가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다가 참사가 났어.” “아.” 언니는 밀리의 서재에서 언니가 밑줄 친 문장들을 보여줬어. 언니의 블로그도. 블로그명을 기억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내려 해도 도무지 기억이 안 나. 방금 언니의 블로그에서 봤던 것 같은 키워드를 네이버 검색창에 입력해 봤는데, ‘수영 일기’라는 타이틀을 단 블로그 글이 떴어. 음, 언니가 수영을 즐길 것 같지는 않아. 아, 찾았다. 언니의 입에서 자주 나왔던 두 개의 단어를 겹쳐 검색해서 겨우 찾았네. 그날은 태블릿을 들고 있는 언니 팔이 아플까 봐 후다닥 넘겨봤었는데, 천천히 읽어보니까 참 새삼스럽다. 우리가 짧은 버킷리스트를 적었던 언니의 작은 노트도 블로그 속 사진에 있더라. 결국 우리는 그 중 아무것도 실현하지 못했어. 언니는 그 메모를 다시 읽어봤을까. 그걸 읽으면서 단 일 분, 아니, 일 초라도 내 생각을 했을까. 그랬으면 좋겠어. 언니가 내 생각에 나처럼 전전긍긍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한 번쯤은 언니에게 유리로 된 고래를 건네던 내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 


어제 조퇴하고 병원에 가다가 우연히 언니와 머리색이 같은 사람이 있더라. 난 그게 꼭 언니인 줄만 알았어. 버스의 맨 앞 좌석에 앉아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는데, 언니가 조퇴하거나 외출하는 일은 퍽 흔했으니까 내가 그렇게 생각한 데에 근거가 없는 건 아냐. 아무튼, 난 그 사람이 언니인 줄 알고 잔뜩 긴장해 있었어. 꼴이 말이 아니었거든. 물론 평소에 언니를 마주칠 때도 그랬지만, 학교가 아닌 곳에서 화장 하나 하지 않은 얼굴로 언니를 보자니 더 떨리는 거 있지. 물론 언니는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나를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지나가겠지만.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체육복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리게 되더라. 그 사람이 내리려고 몸을 돌릴 때야 언니가 아니란 걸 알았어. 덕분에 친구에게 문자로 난리를 치던 행동이 민망해졌지. 


언니가 내게 알려준 건, 아직은 세상이 충분히 열려 있지 않다는 거야. 모든 형태의 사랑을 존중하기에 사람들은 너무나도 편협하다는 거. 좋은 꿈일수록 너무 빨리 깨어 버리고 만다는 거. 인간은 지나치게 우매한 종이라는 거. 어쩌면 체체파리가 우리보다 고매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거. 처음 꾼 그 찰나의 백일몽이 나를 이단아로 만들어 버렸다는 걸 꼭 이야기하고 싶었어. 나는 다름을 존중하지 않는 내 옛 종교와 멀어져 그들을 내려보고, 나의 일부분만으로 나를 꺼리는 친구와 상종하지 않게 됐어. 머리색이 그게 뭐냐는 선생님의 트집에 뿌리염색을 다시 하고, 가슴께로 내려오던 머리를 어깨 위로 잘라 버렸어. 


언니는 어때? 잘 지내? 


2025년 4월. 디어 마이



[심사위원 작품평] 

한때 사랑했던 언니, 그리고 그 언니와 함께 보낸 시간을 추억하는 애틋한 마음을 편지 형식의 글에 담아 개성 있는 글솜씨로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비단 언니를 떠올리는 일에 그치지 않고 모든 형태의 사랑이 존중되길 바라는 울림 있는 메시지를 함께 전하고 있습니다. 비록 나와 공통점이 많았던 그 언니와는 멀어진 지금이지만, 영님께서 당신을 소중히 여기고 당신의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특별한 누군가를 만나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오래가서 행복하길 바랍니다.

심사위원 오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