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무지개백일장 수상작

학교, 나 그리고 우리 / 유니, 2007년생, 띵동상

‘좆됐다.’

첫사랑을 자각한 순간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한 문장. 나의 짧은 감상평이었다. 중학교 2학년, 봄. 한참 사랑을 알게 될 나이이다. 심지어 나는 꽤 늦은 감도 있다. 친구들은 대부분 초등학생일 때 첫사랑을 경험했고 난 이것에 대해 소외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나에게도 찾아온 것이다. 비록 달갑지 않은 형태이지만 말이다. 

나는 모태신앙으로, 세례명까지 있는 독실한 신자였으니 첫사랑에 대한 감상평으로 ‘좆됐다’가 나온 이유는 짐작이 될 것이다. 동성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니다. 이전부터 어렴풋이 ‘설마’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스스로 ‘아직 어려서 그래’라는 지식인에 나올 법한 결론을 내리며 마음속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나의 정체성.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벚꽃이 예쁘게 피기로 유명한 우리 학교 운동장.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짓는 화사한 미소, 부정할 수 없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확신을 갖게 해준 나의 첫사랑이 찾아왔다. 이렇게 로맨틱한 서술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사실 첫사랑은 내 평화롭던 유년시절의 끝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그리고 청소년 퀴어로서의 다이내믹한 인생의 막이 열렸다. 

나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나서 세상의 부조리나 고통을 전혀 모르고 살았다. 나에게 가장 큰 고통은 대치동에서 밤 열 시까지 공부를 끝내고 집에 오는 길에 차가 막히는 일뿐이었으니 말 다 했다. 부모님의 넘쳐나는 사랑. 여기에 운 좋게도 공부 머리를 타고났으니 앞으로의 미래는 보장되어 있었다. 애초에 그것 외의 다른 선택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게 여겨지는 삶을 살게 될 터였다. 하지만 으레 첫사랑이란 게 새로운 무언가를 알게 해 주는 존재인 만큼 나의 삶은 너무나도 새로워졌다. 

정상성이란 무섭게도 매력적인 것이다. 나를 다수자로 만들어주며 사회적인 안정감을 주는 바운더리. 어릴 적 나는 그 실체를 몰랐지만, 정상성을 포기할 경우 얻게 될 두려움에 대한 인지는 있었고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부정한 이유였다. 어렸던 나에게 세상과 싸우는 일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오히려 세상이 옳은 것이고 내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마음이 심란해서 잠 못 드는 밤이면 '차라리 내가 남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또는 '남자를 좋아했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았겠지?'. 이런 생각을 셀 수도 없이 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퀴어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난 사랑을 선택했다. 사랑하면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청소년 퀴어로서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를 간과하고 있었다. 이성애자가 말하는 ‘사랑하면 용기가 생겨’ 따위의 말은 우습게 들릴 정도로 훨씬 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새로운 세계를 받아들이면서 나는 내가 속한 세계의 부조리함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처음은 동성애를 죄악이며 정신병이라고 말하던 부모님이었다. 정체성을 인정한 이후로 날 가장 괴롭게 만든 것은 가족이었다. 어릴 적부터 나는 유독 언어능력이 좋은 유치원생으로, 그날 있었던 일을 쫑알쫑알 모두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비밀을 생긴 뒤로는 부모님에게 마음을 열 수가 없었다. 비밀이 들킬까 봐 언제나 전전긍긍했다. 비밀을 들켰을 때 부모님이 보일 반응을 상상하며 홀로 슬퍼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나처럼 자랑스러운 딸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싫어하진 않겠지? 나를 아픈 사람 취급하거나 더럽게 여기면 어떡하지? 그런 걱정들을 하며 나는 병들었다. 

그런 내게 공부는 증명수단이었다. 훗날 내가 얼마나 착한 딸이었는지를 증명해 줄 수단 말이다. 지금은 내가 성격이 온순하고 공부를 꽤 하니까 바람직한 자식으로 여겨지는 거지, 결혼하고 가족을 꾸릴 나이가 되면 난 최악의 자식이 될 터이다. 

가족이 일찍 나를 포기하게 하는 게 더 편하다는 퀴어 친구들의 조언이 있었지만,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는 것은 내게 정말 어려웠다. 나는 먹기 싫은 음식을 마지막에 먹는 타입이다. 부모님을 실망하게 하는 일도 최후의 최후로 남겨두고 싶었다. 나의 잘못도 아니지만,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부모님을 미워하는 것보다 딱 세 배만큼 부모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국 좋은 성적으로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는 다짐도 지켜지지 못했다. 스트레스가 학업성취에 얼마나 영향을 주는지를 간과한 것이다. 청소년 퀴어가 받는 차별은 대부분 조롱이나 멸시처럼 실체가 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스트레스로 인한 학업성취도 저하는 명백한 불이익이자 차별의 결과 아닌가? 청소년 퀴어들이 겪는 차별은 너무나 과소평가된다. 

많은 퀴어가 공감하겠지만, 남녀공학에서 퀴어로 살아남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연애하는 헤테로들이 넘쳐나는 양기의 공간! 그곳에서 퀴어의 존재는 잊히기 일쑤이며, 언급되더라도 철저히 타자화, 희화화된다. 가령 개그 소재로 사용할 때는 모두가 웃지만, 퀴어 당사자에게는 냉담한 태도를 보이며 따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내 귀에 성소수자 혐오 발언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나의 지향성을 자각하고 난 후의 일이다. '없던 귀가 생긴 것도 아닌데 왜 여태 몰랐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성소수자에 대한 질 나쁜 농담들은 교실에 만연했다. 짓궂게도 게이인 척 행동하며 반 친구들을 웃기는 것을 좋아하는 애도 있었다. 그 애가 게이 연기를 하면 다른 아이들은 더럽다고 욕을 하면서도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웃는다. 이 웃음은 많은 걸 내포하고 있다. 퀴어라는 존재는 조롱거리이며, 커밍아웃을 한다면 이런 취급을 받게 될 것이라는 협박이기도 하다. 의도가 어땠건 간에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농담이란 잔인하다. 이 연극은 철저히 허구성이라는 조건 아래 성립할 수 있다. 퀴어라는 존재는 무대 위에서만 인정받는다. 무대 밖의 내 가족이나 친구가 퀴어라는 사실은 비퀴어들에게 매우 버거운 사실인가 보다. 그 속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따라 웃을 뿐이다. 대부분의 퀴어는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터이다. 이게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져도, 당사자는 가슴이 철렁하며 내면의 무언가가 무너지는 기분이다. 그런 순간들을 겪으면서 절대 내 존재를 드러내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굳히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말하는 '게이인 건 상관없는데 티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말은 정말 이기적인 말이다. 퀴어들은 자기 자신을 숨기는 것과 각종 거짓말에 도가 틀 수밖에 없다. 티를 낸다면 그 혐오와 멸시를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과연 모를까? 그럼에도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은 커밍아웃을 했을 때의 괴로움보다 하지 않았을 때의 괴로움이 더 큰 것이다. 하지만 비퀴어들은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을 때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토록 오만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처음 경험했던 시기는 너무나 괴로웠다. 존경했던 수학 선생님을 더는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의 실체를 알아보고는 모욕적인 말을 퍼부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이런 경험은 두 손으로도 셀 수 없는데, 겪을 때마다 처음 겪는 듯이 괴로운 것이 야속하다. 

친구가 혐오 발언을 할 때면 슬픔이 더 컸다. 정말 좋은 사람인데, 그런 사람마저 나를 혐오한다는 걸 느낄 때면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진다. 나의 어떤 부분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퀴어는 자신의 사람을 만들기도 어렵다. 좋은 사람을 사귈 기회도 비퀴어보다 적다. 

비유를 하자면 퀴어는 언제나 따돌림당하는 기분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이런 비유를 들 수 있는 이유는 따돌림을 당해봤기 때문이다. 주도자는 내가 퀴어인 것을 알뿐만 아니라 나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아는 친구였다. 오픈퀴어도 아닌 내가 많은 걸 말했다는 건 그만큼 그 애를 믿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유도 모르고 괴롭힘을 당하게 되자, 난 너무나 무력했다. 그 애가 나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혹시 어른들에게 내가 퀴어라는 사실을 말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도저히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항상 상위 1%를 유지하던 성적도 수직 하락했다. 그 뒤로는 악순환이었다. 따돌림당했던 경험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고 자기 혐오와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그것이 지금 나의 상태이다. 청소년 퀴어가 겪을 수 있는 안 좋은 일들을 모두 체험해보는 듯하다. 하지만 누군가는 내 말에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겠다. 가장 나와 가까운 친구 중에서도 극단적으로 상황이 치닫는 경우가 있었다. 


조금 희망찬 얘기를 해볼까? 나는 중학생 때 호주로 유학을 갔었다. 내가 다니던 국제 학교에는 '우리는 퀴어를 환영합니다' 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우리나라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만 가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현수막 앞에서 호모를 들먹이며 욕을 하던 아이들의 국적이 모두 한국이었다는 점은 매우 부끄러웠지만 말이다. 이 일은 내게 분명한 전환점이 되었다. 한국을 떠나면 되겠구나! 하지만 모든 퀴어가 한국을 벗어날 수는 없다는 걸 안다. 한국을 싫어하는 만큼 한국을 좋아해서 떠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치 부모님처럼 말이다. 우리 퀴어의 마음은 이토록 복잡하다.


여기에 더해, 호주 사진을 정리하다가 퀴어 퍼레이드에 갔던 사진을 부모님께 들킨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겪고 난 후 부모님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연기해야 했다. 그 뒤로도 부모님이 휴대폰을 검사하는 날이면 불안함에 뜬눈으로 밤을 보내곤 했다.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왜 나만 이렇게 불안에 떨어야 하지?’였다. 마치 교회 사람들 말대로 내가 죄를 저지른 것 같았다. 내 정체성을 인정한 뒤로는 교회에 간 적이 거의 없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동성애에 대한 안 좋은 말이 많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속이 좋지 않았다. 친구들에게는 우스갯소리로 이렇게 말하곤 한다. ‘교회에 가면 퇴마당하는 느낌이라구.’ 농담처럼 들리겠지만 나의 마음을 가장 비슷하게 표현한 말이다. 사회에 나가도 나의 존재에 대한 부정과 모욕을 듣는 경험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나를 비롯한 퀴어 청소년들은 겪고 있다.

차별이란 무엇인가. 실체가 없는 관념과 싸우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어디서부터가 차별이고 아닌지를 구분 짓기 힘든 탓도 있다. 그러니까 내 글은 일종의 고발 글이다. 청소년 퀴어가 겪는 아픔을 모두 담지는 못했지만 괴로워도 괴롭다고 말할 수 없는 청소년 퀴어들이 여기에 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우리를 외면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하고 싶다.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유니님의 글이 청소년 퀴어가 학교와 가족, 넓게는 이 세상이 낯설어하는 정체성을 감춘 채 사람들에게 익숙한 정체성을 필사적으로 '연기'해야 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그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를 잘 보여준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유니님은 '정상성'을 요구하는 세상과 싸우는 일이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고 말씀하셨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밝힌 일이야말로 이 세상에 맞선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유니님의 그 '유니크'한 용기가 나비효과를 불러일으켜, '우리는 퀴어를 환영합니다'라는 현수막이 지금보다 많은 사람 앞에서 펄럭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함께하겠습니다.

심사위원 오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