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무지개백일장 수상작

학교와 나, 그리고 접속법의 계제 / 노이한, 2008년생, 띵동상

 모든 인간은 사회 속에서 특정한 삶의 궤도를 부여받는다.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지역에서 출생한 인간 군집은 인생의 개별 시기에 걸쳐 근사(近似)한 사건 몇 가지를 공통으로 경험하며, 이 과정에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타인들과 동질감을 느끼고 집단 내에서 소속감을 체화한다. 몇몇 구체적이고 특수한 조건에 따라 생애 주기에 따른 사건들의 체현 양상은 다소의 차이를 나타낼 수 있으나 이 경우에도 대부분의 인간은 여전히 군집 내에서 그 일원으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때때로 누군가는 그러한 통상적 삶의 양식 내에 수용될 기회를 박탈당한다. 군집에 대한 시민권을 부여받지 못한 인간은 대개 또 다른 군집 내에서의 소속감으로 삶을 지탱하게 되는데, 때때로 누군가는 동시에 여러 축의 집단에서 추방당한다. 무국적자나 다름없는 신분을 강요받은 그러한 인간은 진공 속에서 부유하며 허공을 정처 없이 유영한다. 이런 사람은 으레 군집을 통해 지상 위에 발을 디딘 채 살아가는 평온한 삶들을 바라보며 음울하고 외로운 사유와 감흥들 속으로 침잠한다. 그리고 이것은 평범한 남학생으로서의 삶을 다층적으로 박탈당한 소년의 이야기이다.

1. 졸업식

 오전 10시가 넘은 시각임에도 대다수의 S 중학교 3학년생들은 아직 교문에도 채 당도하지 아니하였다. 졸업 행사가 10시 30분에야 시작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나는 작년 9월경부터 나와 긴밀한 상호 신뢰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한 사람의 벗 그리고 여타의 이름 모를 동급생 몇 사람과 함께 한 시간여 전부터 방송실에 결집해 있었으니, 이는 학교의 실권자 몇 사람이 학업 성취 양상을 지상 가치로 여기는 이 나라 교육 풍토를 적극 반영하여 학년 석차 최상위의 몇 사람에게 졸업식 날 표창장을 수여하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회색 바지에다 흰색 셔츠, 그 위에 남색 조끼와 회색 재킷을 걸친 채 접이식 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정면만을 응시했다. 몇 자리 건너의 벗은 대체로 비슷한 차림이나 나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첫째로 그의 재킷은 흑색이다. 남녀 학생의 교복 재킷을 각기 다른 색으로 지정하고자 하는 획기적인 아이디어의 입안자는 어인 연유로 한 학교 학생들의 웃옷 색을 달리하였는가. 내게도 흑색 재킷을 걸칠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도 나는 통일감과 애교심, 소속감을 창출한다는 이유로 일천여 명 전교생에게 모두 같은 교복을 입히고자 하는 사람들이 왜 재킷 색의 비일관성에 대해서는 일체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가 하는 짤막한 냉소로 이러한 상황을 일단락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회색 재킷을 입어야만 했다. 하이 웨이스트 디자인에 허리를 여성스럽게 강조하는 라인이 삽입된 회색 재킷은 여체에 유폐된 죄수를 위한 수형복이었다. 그에 반하여 흑단빛 부직포 위로 금색 단추가 빛나는 벗의 착장은 마치 프로이센 장교 같았다.

 둘째로 벗이 교복 셔츠를 정갈하게 착용한 것과는 달리 난 학년 주임 선생님 몰래 사제 셔츠를 걸친 차림이었다. 여학생 블라우스의 허리 강조 라인을 회피하고자 하는 까닭이었다. 조끼에 재킷까지 입으니 그 아래의 셔츠가 사제인가 하는 것은 얼핏 보아 판별하기 어렵고, 또 모범 학생으로 인정받아 방송실까지 당도한 나의 차림을 세세히 검문하지도 않으리라는 생각에, 사복이 난무하는 12월에도 복장 규정을 준수하던 나는 마지막 날 담대히 사제 셔츠를 걸친 것이었다.

 곧이어 졸업 행사가 시작되었다. 사회를 맡은 중년 여선생님이 신실한 호감과 친의를 담아 어느 여학생의 이름을 호명할 적에 나는 연단 앞으로 걸어나가 S 중학교 운영위원회장으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여학생 재킷 위로 장발을 늘어뜨린 내 모습이 각 학급의 텔레비전으로 송출된 뒤에는 남의 이름이 새겨진 종이를 무심히 무릎에 올린 채 여타 동급생들이 저마다 긍지와 기쁨 속에서 표창장을 받아보는 모습을 차례로 목도했다.

 이어서 교장과 학생 주임과 3학년 담임 선생님들의 축사가 이어졌는데, 나를 포함한 방송실 내 대부분의 학생은 행사 시작 부근에 부여받은 팸플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팸플릿에는 통상적 문구와 S 중학교생의 대외 수상 실적 뒤로 금년도 특수목적고 진학 실적 일람을 정리한 표가 인쇄되어 있었다. 나의 벗과 다른 학생 한 명은 강원도의 자율형 사립고인 M고에 진학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나 역시 M고를 꿈꿨다. 자유롭게 다양한 심화 과목을 수강하며 학문의 날개를 펴는 꿈을, 유사한 관심 분야를 가진 학우들과 자유롭게 연구 주제를 정해 탐구하는 꿈을, 별난 범생이인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대로 살아가는 꿈을 꾸었었다. 내신 성적과 생활기록부 역시 M고에 진학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나는 M고에 갈 수 없었다. 치마 교복을 입은 채 보내는 3년이 두려웠다. 이미 대외적으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상황에서 치마를 걸치는 것은 내 최후의 존엄을 스스로 모욕하고 얼마 없는 남성성마저 박탈하는 꼴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회색 재킷보다 더한 고통을 감내할 만큼의 가치는 없으리라는 생각에 M고를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지원한 경기도 소재 특수목적고 C고의 합격증은 내게 별다른 기쁨도 성취감도 주지 못했다.

 졸업 행사는 금방 종료되었다. 도처에서 학우들이 가족과 친한 아이들과 모여 꽃다발을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내게는 친구가 많지 않았으므로 사진을 찍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온라인상의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 만난 트랜스 남성 학생들은 여느 남성 학우들과 함께 농구나 게임을 한더랬다. 그러나 페이커가 아니라 페트라르카를 우상으로 삼는 이런 사람과는 뉘 친구를 맺으려나? 사르트르나 마르크스에 대해 담화를 나눌 의향이 있는 학생은 이미 몇 없었는데 그중 나를 남학우로 보아 줄 이를 추리고 나니 11개 학급 학생 중 내가 벗이라고 부를 이는 열 사람이 채 되지 않았다.

2. 고등학교

 3월이 되자 전년도 생활기록부를 열람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항목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성실히 교회를 다니며 교실 내에서 성소수자 관련 대화를 전면 금지한 영어 선생이 쓴 글로, 나의 학업 성취도와 성실성에 대해 예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생활기록부의 내용은 대체로 만족스러웠지만 이는 내 것이 아니다. 인적사항란의 성별 항목에 한 글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단음절의 단어가 낙인처럼 파고들었다. 성명란에는 또 남의 이름이다. 그리고 또 회색 교복 재킷을 걸친 장발의 저 소녀는 내가 아니되 뉘시던가? 답답한 심정에 재빨리 나이스 앱을 종료하고 말았다. 더 이상 중학교 시절을 돌아보려 해서는 아니 된다.

 나이스 대신 접속한 인스타그램에는 M고 기숙사와 교정을 찍어 올린 벗의 게시물이 있었다. 원하던 기숙사제 학교에 진학한 나의 친구들은 저마다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학교생활을 영위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밤마다 이성의 옆자리에서 잠을 청한 뒤 이튿날 아침이면 고운 남색 치마를 걸친 여학생들이 줄지어 등교하는 가운데 어색한 침입자처럼 그 행렬에 끼어든 채 답답하고 억울한 심정으로 여자 기숙사 출입구를 나서야 했다. 더군다나 C고의 교육과정은 나를 지적으로 만족시켜 주지도 못한 바였다. 첫날부터 머릿속에 떠돌던 자퇴의 이미지. 중간고사를 앞둔 4월의 어느 날, 나는 자퇴원을 제출했다. 흩날리는 벚꽃잎 아래에서 급우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라타 학교를 떠났다. 모범 학생은 그렇게 학교 밖 청소년이 되었다.

3. 마무리

 내가 잘못된 성염색체를 가지고 태어나는 중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나는 어떤 삶의 궤도에 살게 되었을지 종종 상상한다. 여성스럽지 않은 평범한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며, 여자 화장실에서 소녀들의 화장품 내음을 맡으며 자괴감을 느끼지 않고, 내 이름 적힌 성적표를 받는 삶. 기숙사에서 동성 친구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M고 생활을 보내고, 검정고시 없이 수시 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한 뒤엔 근심 없이 여자 친구를 사귀는 삶. 어디에서나 평범한 남학생으로 지내다 입대하고 전역하고 여자와 결혼하고 내 씨로 아이를 가지는 삶. 그런 평범한 삶의 이미지가 종종 뇌리를 미혹하고 가망 없는 환상과 꿈으로 내 영을 휘젓는다.

 중학교 시절 읽었던 라틴어 관련 서적에서 접속법에 관한 내용을 읽은 일이 있다. 직설법이 현실 세계에서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진술하는 것이라면 접속법은 발생하지 않은 일에 대한 염원과 가정을 담아 말할 때 쓰이는 말법이다. 로망스어에 유독 취약했던 나는 당시로서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의 나는 접속법이 무엇인지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일생을 접속법으로 살아내는데 어찌 그 뜻을 모르랴? 접속법은 현화되지 못한 이상에 관한 진술, 현실 상황과는 다른 가능성에 관한 기술이다. 접속법은 갈망이요 꿈이요 희망이다. 그리고 남자로서의 내 삶은 접속법의 계제이다. 대다수에게 직설법의 범속한 일상인 삶의 궤도를 접속법으로만 그려 내며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는 있는 것이다.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이한님의 글이 수준 높은 문장력과 어휘력에 더해 자기만의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이를 문학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짧고 길게 숨 쉬고 있는 문장은 우리의 삶이 단지 오늘만이 아니라 먼 어제에서 시작하여 긴 내일로 이어질 것을 알게 하며, 그 안에 담긴 선택의 이야기는 우리가 그저 세상이 정한 대로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합니다. 염원과 가정의 접속법으로 서술된 삶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다른 가능성과 접속하게 합니다. 

심사위원 현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