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본능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경계한다. 마치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성가신 걸림돌이 되니까. 하지만 우리는, 성소수자는 늘 존재해 왔다. 다수가 천대한다 해서 풀이 죽어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여 그들은 세상에 그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인식을 개선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악습을 뿌리 뽑는 건 힘든 일이다. 몇몇 아이들은 자신의 혀가 어떤 이에게 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저 멋져 보이는 줄 알고 입을 놀린다. 결국 안타깝게도, 바른 생각을 하던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무의식적으로 편견을 주입한다. 이와 같은 일은 교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작년 나의 반은 다른 것에 대한 공포가 어마어마했다. 주동자 아이들은 수업 시간 쉬는 시간 가리지 않고 각종 혐오 표현을 쏟아냈다. ‘너 장애냐’, ‘남자애가 여자처럼 행동해서 웃기다’, ‘저 얼굴이 여자가 맞냐’, ‘트젠(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사람을 부정적으로 가리키는 줄임말로 통용) 토 나온다’, 그 외 인종 차별 표현과 날카로운 칼날 못지않은 말들. 괴로웠다. 다수가 소수를 찌르는 광경을 매일 옆에서 보고도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나를 질책했다.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될 수 있고, 많은 나라에서 아시안 혐오 범죄가 심각하다는 것을. 또, 너희들의 시선 때문에 표현하지 않을 뿐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제지해야 마땅했음에도, 일대일로 맞서기 힘든 권력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 나는 혼자고 저들은 무리니 내가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 것은 뻔했다. 다수, 즉 강자의 힘을 그들은 일찍이 깨닫고 활용하고 있었다.
2학기에 나는 그 아이들의 눈에 띄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짧게 자른 머리가 이상하다는 이유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내 성적 지향이 알려졌다면 더 심한 괴롭힘에 시달렸을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은 어차피 남의 일이라 생각하여 방관하였을까. 어른들이라고 나을 건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애들이 철없어서 그런 거니 거슬리겠지만 이해해 주라고 하셨고, 아빠는 그 아이들이 감옥에 갈 정도로 나쁘진 않다고 하셨다. 보는 관점이 아예 다른 것 같아 너무나도 답답했다. 내상을 이만큼 입었는데도 어른들은 '잘못이 그렇게 무겁지는 않다'며 덮으려 했다. 도덕관념이 형성되기 전의 단순 장난과, 깊은 상처를 남기는 혐오는 엄연히 다른데 말이다. 어쩌면 나는 혐오 표현 자체보다 주변 이의 무관심에 더욱 다쳤는지 모른다. 통쾌한 복수는 소설 속 이야기일 뿐, 이 씁쓸한 이야기에 반전은 없었다. 나는 흉터를 끌어안고 겨울 방학을 맞았다.
다시 그 아이들을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다. '대체 왜 그랬던 거야?' 어떤 답을 들어도 시원찮겠지만,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대답만은 부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친구가 하길래 따라 했다’, ‘그냥 세고 멋져 보였다’ 정도라면 교정이 쉽다. 함부로 내뱉은 말의 실상을 깨닫고 반성하도록 도와주면 된다. 아이들은 스펀지 같아서 흡수가 잘되는 반면, 건져서 말려도 금세 보송해지기 때문이다. 반면 이미 생각을 굳혀 버린 어른들은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한 편견을 고치기 어렵다. 나는 청소년들 역시 그 길로 접어드는 것만 같아 눈앞이 아찔하다.
건강한 아이가 건강한 어른으로 자란다. 그래, 그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때 묻진 않았겠지. 어딘가로부터 옮은 것이다. 제대로 배웠다면, 애꿎은 누군가를 칼로 찌르지 않았어도 될 일. 어린아이가 올바른 지식을 습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어른들의 몫이다. 그 아이들의 곁에는 누가 있었는가. 어쩌면 그 아이들도 곧게 자랄 수 있었을 텐데. 진한 미련이 남는다.
몇 문단의 글로 담담히 풀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나는 괴로웠다. 누구도 그런 종류의 아픔은 겪으면 안 된다. 모든 소수자와 약자들이 이 같은 경험과 맞서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심사위원 작품평] 내 옆에 성소수자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학교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아물도록 돕지 않은 어른들의 무관심 때문에, 얼마나 외롭고 상심이 컸을까요. 하지만 글을 쓰는 순간에 그 괴로운 마음을 누르고 또 눌러가며, 다른 소수자는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따뜻한 바람을 드러낸 조각님의 글에 박수를 보냅니다. 남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상처를 드러낸 조각님의 그 용기 한 조각이 모이고 모이면, 분명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함께, 그 변화를 만들어 갑시다. 심사위원 오세진 |
사람은 본능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경계한다. 마치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성가신 걸림돌이 되니까. 하지만 우리는, 성소수자는 늘 존재해 왔다. 다수가 천대한다 해서 풀이 죽어 사그라지지 않았다. 하여 그들은 세상에 그들의 이야기를 알리고 인식을 개선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악습을 뿌리 뽑는 건 힘든 일이다. 몇몇 아이들은 자신의 혀가 어떤 이에게 칼로 다가온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저 멋져 보이는 줄 알고 입을 놀린다. 결국 안타깝게도, 바른 생각을 하던 다른 아이들에게까지 무의식적으로 편견을 주입한다. 이와 같은 일은 교실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작년 나의 반은 다른 것에 대한 공포가 어마어마했다. 주동자 아이들은 수업 시간 쉬는 시간 가리지 않고 각종 혐오 표현을 쏟아냈다. ‘너 장애냐’, ‘남자애가 여자처럼 행동해서 웃기다’, ‘저 얼굴이 여자가 맞냐’, ‘트젠(자신을 트랜스젠더로 정체화한 사람을 부정적으로 가리키는 줄임말로 통용) 토 나온다’, 그 외 인종 차별 표현과 날카로운 칼날 못지않은 말들. 괴로웠다. 다수가 소수를 찌르는 광경을 매일 옆에서 보고도 행동을 취하지 못하는 나를 질책했다.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될 수 있고, 많은 나라에서 아시안 혐오 범죄가 심각하다는 것을. 또, 너희들의 시선 때문에 표현하지 않을 뿐 성소수자는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제지해야 마땅했음에도, 일대일로 맞서기 힘든 권력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 나는 혼자고 저들은 무리니 내가 이상한 사람 취급 받을 것은 뻔했다. 다수, 즉 강자의 힘을 그들은 일찍이 깨닫고 활용하고 있었다.
2학기에 나는 그 아이들의 눈에 띄어 공격 대상이 되었다. 짧게 자른 머리가 이상하다는 이유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내 성적 지향이 알려졌다면 더 심한 괴롭힘에 시달렸을 것이다. 나머지 아이들은 어차피 남의 일이라 생각하여 방관하였을까. 어른들이라고 나을 건 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애들이 철없어서 그런 거니 거슬리겠지만 이해해 주라고 하셨고, 아빠는 그 아이들이 감옥에 갈 정도로 나쁘진 않다고 하셨다. 보는 관점이 아예 다른 것 같아 너무나도 답답했다. 내상을 이만큼 입었는데도 어른들은 '잘못이 그렇게 무겁지는 않다'며 덮으려 했다. 도덕관념이 형성되기 전의 단순 장난과, 깊은 상처를 남기는 혐오는 엄연히 다른데 말이다. 어쩌면 나는 혐오 표현 자체보다 주변 이의 무관심에 더욱 다쳤는지 모른다. 통쾌한 복수는 소설 속 이야기일 뿐, 이 씁쓸한 이야기에 반전은 없었다. 나는 흉터를 끌어안고 겨울 방학을 맞았다.
다시 그 아이들을 만난다면 물어보고 싶다. '대체 왜 그랬던 거야?' 어떤 답을 들어도 시원찮겠지만, 성소수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대답만은 부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친구가 하길래 따라 했다’, ‘그냥 세고 멋져 보였다’ 정도라면 교정이 쉽다. 함부로 내뱉은 말의 실상을 깨닫고 반성하도록 도와주면 된다. 아이들은 스펀지 같아서 흡수가 잘되는 반면, 건져서 말려도 금세 보송해지기 때문이다. 반면 이미 생각을 굳혀 버린 어른들은 본인이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한 편견을 고치기 어렵다. 나는 청소년들 역시 그 길로 접어드는 것만 같아 눈앞이 아찔하다.
건강한 아이가 건강한 어른으로 자란다. 그래, 그 아이들이 태어날 때부터 때 묻진 않았겠지. 어딘가로부터 옮은 것이다. 제대로 배웠다면, 애꿎은 누군가를 칼로 찌르지 않았어도 될 일. 어린아이가 올바른 지식을 습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어른들의 몫이다. 그 아이들의 곁에는 누가 있었는가. 어쩌면 그 아이들도 곧게 자랄 수 있었을 텐데. 진한 미련이 남는다.
몇 문단의 글로 담담히 풀어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말하건대, 나는 괴로웠다. 누구도 그런 종류의 아픔은 겪으면 안 된다. 모든 소수자와 약자들이 이 같은 경험과 맞서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심사위원 작품평]
내 옆에 성소수자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학교 때문에, 마음의 상처가 아물도록 돕지 않은 어른들의 무관심 때문에, 얼마나 외롭고 상심이 컸을까요. 하지만 글을 쓰는 순간에 그 괴로운 마음을 누르고 또 눌러가며, 다른 소수자는 나와 같은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따뜻한 바람을 드러낸 조각님의 글에 박수를 보냅니다. 남에게 털어놓기 어려운 상처를 드러낸 조각님의 그 용기 한 조각이 모이고 모이면, 분명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 함께, 그 변화를 만들어 갑시다.
심사위원 오세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