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무지개백일장 수상작

학교와 나, 그리고 세상의 하”나” / 미루, 2006년생, 목소리상

  ‘성별’이라는 단어와 관련한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화장실과 관련된 기억이다.

  서너 살쯤 되었을 때였으려나, 큰일을 보고 있는데 한 아이가 소변이 마렵다며 내가 있는 화장실로 걸어오는 것이었다. 화장실에는 좌변기, 소변기가 하나씩 있었는데, 내가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 아이에게 소변기에 앉아 소변을 보는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소변기에 치마를 내린 채 앉아 소변을 보았다. 화장실 바닥이 누런색으로 물드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줌 바다가 된 화장실을 보며 나도, 아이도 적잖이 당황했고, 몽땅 젖은 아이가 선생님과 함께 화장실을 나가는 모습을 보며 어린 나는 홀로 화장실에 남겨진 채 변기에 앉아‘남자와 여자는 아무래도 같을 수 없는가 보다.’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이내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린 나는 무엇보다 함께 놀 수 있는지가 중요했고, 성별이 다르다는 것만으로는 함께 노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년 남짓한 시간이 흘러 나는 유치원에 가게 되었고, 성별보다 큰 걱정거리가 나를 가로막으며 나에게서 ‘성별’이라는 단어에 관한 생각은 차차 사그라들어 갔다.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던 기억을 떠올려 보면 성별보다 나이가 중요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적게는 몇 달에서 많게는 한두 살까지, “내가 너보다 일찍 태어났으니까 내가 먼저야!”라는 말이 자주 오갔던 것 같다. 그래서 한 해 일찍 유치원에 갔던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한 살 어리다는 게 무엇보다도 큰 걱정거리였다. 물론 위의 ‘일찍’은 주로 생일이 더 빠른 경우를 이야기했기에 나이가 어린 건 대부분 상황에서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나 자신에게만은 하나의 콤플렉스로 남아 다른 아이들이 알면 어떻게 될지 걱정하는 날이 많았다. 난 왜 다른 아이들보다 한 살 적은 채로 유치원을 다녀야 하냐며 흐느끼던 밤도 적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까지만 하더라도 나에게 ‘성별’의 차이는 단순히 머리 길이 차이에 불과했던 것 같다. 

  성별을 구분하기 시작한 것은 어른들이었다. 그리고 분기선의 간격은 초등학교 때를 기점으로 끝이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다른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회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었고, 선생님들께서는 이성 친구와 가까이 지내면 넌지시 사귀냐는 질문을 하시고는 했다. “얘는 여자니까 사나이인 네가 봐줘.”, “여자아이가 얌전해야지 어딜 가서 이렇게 다치고 다녀?”와 같이 성별만으로 아이들을 나누는 어른들의 말씀도 주변에서 자주 들리곤 했다. 기초체력평가에서 아이들은 같은 성별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흙냄새와 종이 냄새가 같은 곳에서 땀 냄새로 덮여야 했고, 종이는 흙에 항상 덮이기 일쑤였다.

  초등학교 시절의 내가 신선하게 충격을 받았던 말 중 기억에 남는 말로는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하나가 했던 말이 있는데, 어느 날 대뜸 나에게 “우리 엄마가 너 말고 동성인 애들이랑 놀라고 했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 머리 길이의 차이에 불과했던 성별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나와 친구들을 갈라놓는 높디높은 벽이 되어 있었다.

  “친구는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언젠가 끝날 수도 있는 사이구나.”

  이윽고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내가 살던 지역은 반이 지정 성별에 따라 나뉘었다.

  동성인 아이들로만 이루어진 반에서 편 나누기와 기싸움은 생각보다 더 치열했다. 서열 나누기는 기본에, 인기 많은 친구가 싫어하는 친구는 따돌림당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사랑’이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아이들은 이성 친구와 함께 이야기만 나누어도 사귀는지 엮기 마련이었고, 이성 친구가 있는 아이들은 이성과의 연락 자체를 끊어 버리기도 했다. 이성인 동급생들과 친하게 지내면 별난 아이, 이상한 아이로 낙인찍혔고, 동성인 아이들에게는 ‘어장 관리하는 아이’라는 이야기가 뒤에서 심심찮게 오가고는 했다. 심지어는 “쟤 트젠 아냐?”라는 말까지 나왔는데, 그때 아이들 사이에서는 ‘트랜스젠더’라는 단어가 썩 좋은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에 당시의 나로서도 듣는 당사자의 기분이 나빴을 법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함께 노는 무리도 아이들의 인식이 바뀜에 따라서 남자아이들 무리와 여자아이들 무리로 나뉘었다. 청소년기에 막 접어들 나이인 중학생 때에는 타인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욕구가 커지기 마련인데, 주로 이성인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나는 아이들이 달라지면서 자연스레 친구들과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고, 성별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전에 놀던 친구들과 어우러질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함께한다고 해도 나에게는 아이들이 나를 친구이기 이전에 이성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다른 아이들의 눈치가 신경에 거슬리지 않을 수 없었기에 그 아이들과 함께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더욱 힘들게만 느껴졌다.

 마냥 혼자일 수만은 없었기에 나도 나름대로 친구들을 만들어 보려 했다. 친구 만들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중학교를 다른 학군으로 갔었기에 초등학교 시절부터 서로 친하게 지내던 같은 반의 아이들 대부분에게 따돌림당해 보기도 하고, 학교가 너무 힘들어서 선생님이 계신 수업준비실에서 몇 시간을 울다가 저녁이 다 되어 집에 돌아가기도 했다. 그렇게 한 학기가 홀랑 지나갔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같은 반에서 개인적인 문제로 겉돌다시피 하는 아이가 하나 더 있어서 선생님의 도움으로 그 여름이 끝나 갈 즈음에는 겉돌던 친구와 가까워질 수 있었고, 그 친구가 친하게 지내던 다른 친구들과도 친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내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의 성향이 나와는 맞지 않다는 걸 느꼈고, 친구들도 그걸 느꼈는지 아이들끼리 논다는 이야기가 들려와도 나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마침 그맘때쯤 학교 도서관 공사가 끝났고, 함께 놀 친구도, 마땅히 할 것도 없던 나는 도서관에 들러붙어 사는 학생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 새내기였던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었고, 코로나가 창궐해 온/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했던 1년은 삽시간에 흘러 다음 해가 되었다. 졸업하기 전까지도 도서관을 수시로 드나들던 나는 마지막으로 사서 선생님께 읽을 책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사서 선생님이 성소수자에 관한 내용이 쓰여 있는 책을 추천해 주셨다. 당시는 메갈리안과 워마드 등의 극단적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뉴스에 하루가 멀게 올라왔을뿐더러 나의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도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기에 그 책을 추천해 주신 선생님도 그 책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가 추천해 달라고 했었던 터라 한 번 읽어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게 웬걸, 책을 다 읽으니 오히려 책에 동감하는 내가 남아 있었다. 내가 바라는 나의 이상, 나의 표현대로 이야기하면 나의 내가 자라나기 시작한 때였던 것 같다.

 아니? 아니었다. 나는 나의 나를 있는 힘껏 부정했다. 진심으로 내 이야기가 아니길 바랐다. 내가 가진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도 처참한데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는 성소수자는 어떨까. 게다가 내가 동감하는 감정을 느꼈을 때는 남녀 갈등이 극한까지 치달았을 때가 아니었나. 내가 만약에 성소수자라고 해도 각종 행사에 열심히 참여하며 차별금지법이니, 인권이니 외치며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했다. 치고받고 싸울 자신도 없었고, 소수가 하는 잘못 때문에 언론에 싸잡혀서 함께 욕먹고 싶지도 않았다.

  “사람의 삶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고, 생각도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아.”

  나는, 시스젠더 이성애자이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아이들과 함께 말장난도 치고, 조금은 저렴해 보이기도 하는 별난 아이는 온데간데없고 잃어버린 친구들을 찾아 끝이 보이지 않는, 어쩌면 끝이 없을지도 모르는 터널에 들어가 버린 아직 못 다 큰 아이만 남아 있었다.

 난 지정 성별이 세상에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함께 지내던 아이들과 멀어지면서부터 나는 내 성별을 숨기기 시작했다. 성별에 얽매이지 않은 채 사람들을 대하고 싶었고, 대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 마음은 돌고 돌아 이성인 친구들과 함께 놀고 싶다는 어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갔고, 기어코 나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가 지정 성별이 상대의 성별이었다면 아이들과 허물없이 놀 수 있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빠져든 정체성의 구렁텅이는 밀도 높은 늪처럼 허우적댈수록 깊어져만 갔다.

  “누군가 이때라도 한 명이라도 괜찮다고 이야기해 주었다면, 나는 정말 괜찮았을지도 몰라.”

 ‘디나이얼’, 대부분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난관 중 하나이다. 마음은 시스젠더이고 싶은데, 저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웃으며 지내고 싶은데, 그게 너무 어려웠다. 내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단성 학교, 그러니까 남고, 여고처럼 지정 성별이 같은 학생들만 있는 학교였다. 나에게는 학교가 너무 힘들었다.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는 학교에 다닌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시간이 아까웠는데 모두가 이성이라고 느껴지는 곳이라고 여겨지니 오죽했을까. 학교 건물이 나에게는 감옥처럼 느껴졌고, 다른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보면서 한숨만 늘어 갔다. 쉬는 시간만 되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나가 숨을 고르고는 했고, 방과 후 보충 수업은 안중에도 없이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나자마자 하루도 빠짐없이 집으로 달려갔다. 수업을 빠지고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자신을 가두는 날도 많아졌다. 화장실에 들어가기로 마음먹기도 힘들었지만, 학교 건물에서 내가 그나마 편하다고 느끼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럴 바에야 그만두는 게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낫겠다는 생각에 부모님께 학교를 그만두겠다고도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유를 말하기에 앞서 완강한 반대에 번번이 가로막히곤 했다. 나의 힘듦이 극한에 치닫던 날, 나는 학교에 가지 않기 시작했다.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해도 집에만 처박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독립과 나의 나를 한 걸음 더 내세울 미래를 위해 돈을 벌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회는 학교보다 더 거칠었다. 특정 성별만을 원하는 공고도 많았고, 지정 성별을 더 철저하게 나누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이상향을 위해 돈을 벌려 드는데, 사회는 모순되게도 중학교 시절 느꼈던 ‘시스젠더이고 싶은 욕심’만을 더더욱 크게 만들었다.

 꽃샘추위가 더 춥게 느껴지고, 초가을에 오는 태풍이 더 강하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나의 정체성을 정의한 것이 이르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꼭 늦가을의 해변에 뛰어든 것처럼 외롭고 춥기만 했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내 편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나의 나를 찾아 나서는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더욱 내 편이 아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또 어떤 벽이 나를 가로막을지도 모르겠다. 당장 내년에 뭘 하고 있을지도 확답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는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다.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나의 나, 그러니까 내가 바라는 나의 이상적인 모습으로서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모두가 받아들일 것이라는 기대는 초장에서부터 하지 않는다.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나의 계획대로 내 삶이 흘러갔다면 이미 대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충분히 모아 다른 나라에 어학연수를 떠났을 것이다.

  말이라는 게 참 재미있는 게, 내 삶이 계획대로 풀리지 않는다는 말은 남의 계획대로 삶이 풀리지 않는다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말인즉슨 내가 언젠가는 자의와 별개로 ‘나의 나’로서 세상에 받아들여질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미루님의 글이 자신의 삶을 통시적으로 관찰하며 불편한 결절을 드러낸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미루님의 글과 그 안에 드러난 삶은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이동에 따라 끊임없이 무엇이라 정해지고, 그 구분선 안에 존재하기를 강요당하는 우리 각자의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단지 흘러가지만은 않기 위한 고민과 선택은 또 다른 삶의 결절을 만들어 내고, 선 안에 갇히지 않는 삶의 가능성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미루님과 함께 그 결절을 밟고 벽을 넘을 것입니다. 

심사위원 현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