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요소를 제외하고, 재구성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바이섹슈얼이다. 중학교 때까진 나름 인기를 누리며 줄곧 여자들을 만나왔지만, 중학교 3학년 때 강한 이별을 맞이한 이후로부터 나의 시선은 남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큰 혼란과 공포는 없었다. 중학교 때 남자아이들은 서로를 ‘게이’라고 놀리며 놀아왔으니까 ‘게이’, ‘양성애자’와 같은 단어에 덤덤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는 내가 바이섹슈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굳이 숨기지도, 티 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이전처럼 남자 여자 모두를 대해왔다. 물론 스스로는 강한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 세상의 50%만 좋아할 수 있겠어? 모두 공평하게 좋아해 줘야지!”처럼 말이다.
신난다.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면 살면서 최소 3번 맞이하는 순간이 있다. 졸업사진 촬영. 졸업사진을 찍는다는 소식이 앞 반부터 들려오면, 그 주는 쇼핑의 주간이다. 하루는 백화점, 하루는 아웃렛, 온라인 플랫폼별로 한국에서 옷을 살 수 있는 공간이란 공간은 다 들어가 봐야 직성이 풀린다. 초등학교 졸업사진 촬영은 처음 받아보는 강한 조명과 친구들의 관심에 눈치를 보느라 셔터가 언제 눌리는지, 언제 웃어야 하는지도 모르게 그냥 지나갔다. 그저 출근 전 엄마가 준비해 준 가로선이 쭉쭉 가 있는 피케 셔츠와 청바지 몇 벌을 들고 사진사 선생님이 시키는 국회의원 같은 포즈를 잡고(왜 그렇게 팔짱을 좋아하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포즈를 취하며 나도 500명 중 한 명의 팔짱을 낀 학생으로 남겨졌다. (그렇게 찍힌 졸업사진은 지금까지 3번뿐이 안 열어 봤다. 3번은 지금까지 이사한 횟수다.) 중학교 졸업 사진은 조금 달랐다. 전교에 30명 정도는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스파이더맨 쫄쫄이를 입고 오거나, 엘사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거나, 심지어 어떤 친구는 사탕과 의자를 들고 와 화보를 찍고 갔다. 나도 질 수 없었다. 한국인은 무조건 승리를 해야만 하는 민족 아니겠는가. 학교에서 나눠준 풍선을 들고, 여자 사람 친구의 머리끈을 빌려 사과 머리를 했다. 한 장은 양 갈래로 머리를 묶었고, 한 장은 평범하게 찍었다. 아직도 그날의 추억은 잊을 수 없다. 물론 졸업사진을 열어 본 엄마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평범하고 또 평범했던 30명 중 아들이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당당하게 모든 사진마다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대망의 고등학교 졸업사진 촬영 날이 다가왔다. 이 이야기를 위해 잠시 2개월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두가 피곤함에 찌들어가며 서로의 안부는커녕 자신의 안녕을 기원할 수 없는 고등학교 3학년의 교실은 시험을 앞두고 긴장 그 자체였다. 앞으로 대입에 반영되는 시험은 오직 두 개뿐이다(물론 재수를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1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어디선가 소식이 들려왔다. 중간고사가 끝난 후 일주일 뒤 졸업사진을 찍는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엔 그저 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 종례 시간 담임 선생님은 반장을 통해 조를 정하라고 하셨고, 졸업사진 촬영은 사실이 되었다.
우리 반은 문과반이다. 여자가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고, 남자는 소수에 속한다(젠장, 여기서도 소수다). 자연스럽게 기존의 친구 무리에 따라 여자들은 찢어졌고, 문제는 남자였다. 쪼개지기엔 사람이 적고, 같이 찍기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왔기 때문에 우리 반에는 친한 남자아이들이 전무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누군가 나의 조를 정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한 조로 뭉치기로 되는 것 같았고, 한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걸어준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남자 조로 편성이 되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난 게이랑 사진 찍기 싫은데”
그렇다. 누구에게나 성소수자를 싫어할 권리는 있는 거니까. 본인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히 큰 용기를 요구하니까. 그저 한 명의 발악으로 생각했다. 이후에도 그 친구가 나를 무시하는 과정은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같이 놀리던 남자 친구들이 가끔은 나를 감싸줄 정도였으니까. 나는 졸업사진 회의 시간만 되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귀에 꽂은 이어폰을 더 꽉 조인 채 소리를 끝까지 키워 올렸다. 그 누구의 응답에도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조용히 우리 반 J에게 도움을 청했다. 교실에서 손에 꼽는 대화를 나누는 여자 친구였던 J는 나의 고민에 적극적으로 응해주었다. 사실 그녀도 나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고민도 없이 정 갈 곳이 없다면 한 자리가 남는 자신의 조로 오라는 놀라운 조언을 해주었다. 아직 정한 것이 없어서, 와서 같이 콘셉트부터 정해 나아가도 좋다는 말도 남겼다.
아무도 날 품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갈 곳은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우린 계속해서 회의를 이어갔다. 조별 콘셉트 의상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조별 포즈 등. 계속해서 조에서 소외되는 느낌을 받았던 나는 J가 포함된 조의 친구들에게 모두 동의를 구한 후 그날 결심을 했다.
웬걸, 종례가 끝나고 담임 선생님을 찾아뵈러 가니, 나를 겨냥해 그런 말을 한 친구가 담임 선생님께 조별 인원이 너무 많다고 무조건 조별 인원을 줄여달라며 하소연하고 있었다. 사실 말이 하소연이지, 어디까지나 나랑 같이 사진을 찍기 싫어서 하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너와는 다른 대인배라는 어투로 조를 바꾸겠다고 당당하게 외쳤다. (사실 어깨도 말려들어 가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당당하게 뒤를 돌고 그대로 하교했다.
새로운 조에서 새롭게 준비하는 졸업사진은 훨씬 좋았다. 자유롭게 화장도 하고, 옷도 꾸며 입고, 나를 뽐낼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엔 주춤거렸지만, 더 이상 나를 막을 존재는 사라졌다. 덕분에 난 후회 없이 최고의 헤어&메이크업을 하고, 멋진 의상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게 되어 그날 하루는 행복했다.
그런데 난 대체 왜 그들에게 벌벌 떨어야 했을까. 단지 “제가 성‘소수자’니까요”, 그 이상의 어떤 깊은 이유는 없는 것일까. 혼자 곰곰이 따져보다, 어쩌면 그냥 나도 날 한 명의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당당하게 살아가면 될 텐데 말이다. 혼자서 생각할 권리는 있지만, 누구도 나를 대놓고 까 내리거나 싫어할 이유는 없다.
어쨌든 일련의 사건들이 지난 요즘은 나 자신이 당당하고, 그때 수그린 것에 대해 후회가 밀려온다. 다시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의자를 뻥 차고 당당하게 맞섰을 텐데. (사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약 나에게 또 한 번의 졸업사진을 촬영할 기회가 찾아온다면, 누군가의 졸업사진을 바라볼 기회가 생긴다면 난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왜 우리가 숨어야 하는가.
오늘도 어딘가에서 또 다른 시련을 겪고 있을 청소년 성소수자 친구들이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그날을 꿈꾸며 방에서 외쳐본다.
하나!
둘!
셋!
찰칵!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다다님의 글이 현실적인 소재를 통해 구체적인 삶을 드러낸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곳에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상황, 나와 함께하지 않겠다고 발악하는 목소리에 아무렇지 않은 척 내는 목소리는 우리 모두의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곳을 찾는 용기와 의연함을 내세우는 의지는 우리에게도 용기와 의지를 전합니다. 괄호 안에 숨겨진 진심과 괄호로 드러나는 유머는 우리의 삶이 괄호로 묶여 삭제되지 않으리라는 희망이 됩니다. 심사위원 현민 |
*본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요소를 제외하고, 재구성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바이섹슈얼이다. 중학교 때까진 나름 인기를 누리며 줄곧 여자들을 만나왔지만, 중학교 3학년 때 강한 이별을 맞이한 이후로부터 나의 시선은 남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큰 혼란과 공포는 없었다. 중학교 때 남자아이들은 서로를 ‘게이’라고 놀리며 놀아왔으니까 ‘게이’, ‘양성애자’와 같은 단어에 덤덤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는 내가 바이섹슈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굳이 숨기지도, 티 내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이전처럼 남자 여자 모두를 대해왔다. 물론 스스로는 강한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마치, “어떻게 세상의 50%만 좋아할 수 있겠어? 모두 공평하게 좋아해 줘야지!”처럼 말이다.
신난다. 대한민국의 학생이라면 살면서 최소 3번 맞이하는 순간이 있다. 졸업사진 촬영. 졸업사진을 찍는다는 소식이 앞 반부터 들려오면, 그 주는 쇼핑의 주간이다. 하루는 백화점, 하루는 아웃렛, 온라인 플랫폼별로 한국에서 옷을 살 수 있는 공간이란 공간은 다 들어가 봐야 직성이 풀린다. 초등학교 졸업사진 촬영은 처음 받아보는 강한 조명과 친구들의 관심에 눈치를 보느라 셔터가 언제 눌리는지, 언제 웃어야 하는지도 모르게 그냥 지나갔다. 그저 출근 전 엄마가 준비해 준 가로선이 쭉쭉 가 있는 피케 셔츠와 청바지 몇 벌을 들고 사진사 선생님이 시키는 국회의원 같은 포즈를 잡고(왜 그렇게 팔짱을 좋아하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 포즈를 취하며 나도 500명 중 한 명의 팔짱을 낀 학생으로 남겨졌다. (그렇게 찍힌 졸업사진은 지금까지 3번뿐이 안 열어 봤다. 3번은 지금까지 이사한 횟수다.) 중학교 졸업 사진은 조금 달랐다. 전교에 30명 정도는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스파이더맨 쫄쫄이를 입고 오거나, 엘사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양 갈래로 땋거나, 심지어 어떤 친구는 사탕과 의자를 들고 와 화보를 찍고 갔다. 나도 질 수 없었다. 한국인은 무조건 승리를 해야만 하는 민족 아니겠는가. 학교에서 나눠준 풍선을 들고, 여자 사람 친구의 머리끈을 빌려 사과 머리를 했다. 한 장은 양 갈래로 머리를 묶었고, 한 장은 평범하게 찍었다. 아직도 그날의 추억은 잊을 수 없다. 물론 졸업사진을 열어 본 엄마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평범하고 또 평범했던 30명 중 아들이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당당하게 모든 사진마다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럴 법도 하다.
대망의 고등학교 졸업사진 촬영 날이 다가왔다. 이 이야기를 위해 잠시 2개월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모두가 피곤함에 찌들어가며 서로의 안부는커녕 자신의 안녕을 기원할 수 없는 고등학교 3학년의 교실은 시험을 앞두고 긴장 그 자체였다. 앞으로 대입에 반영되는 시험은 오직 두 개뿐이다(물론 재수를 하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1학기 중간고사를 앞두고 어디선가 소식이 들려왔다. 중간고사가 끝난 후 일주일 뒤 졸업사진을 찍는다는 소식이었다. 처음엔 그저 소문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날 종례 시간 담임 선생님은 반장을 통해 조를 정하라고 하셨고, 졸업사진 촬영은 사실이 되었다.
우리 반은 문과반이다. 여자가 절대다수를 이루고 있고, 남자는 소수에 속한다(젠장, 여기서도 소수다). 자연스럽게 기존의 친구 무리에 따라 여자들은 찢어졌고, 문제는 남자였다. 쪼개지기엔 사람이 적고, 같이 찍기엔 사람이 많았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여자아이들과 어울려 왔기 때문에 우리 반에는 친한 남자아이들이 전무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누군가 나의 조를 정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자연스럽게 한 조로 뭉치기로 되는 것 같았고, 한 친구가 나에게 말을 걸어준 덕분에 나는 자연스럽게 남자 조로 편성이 되었다. 그 말을 듣기 전까지.
“난 게이랑 사진 찍기 싫은데”
그렇다. 누구에게나 성소수자를 싫어할 권리는 있는 거니까. 본인과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히 큰 용기를 요구하니까. 그저 한 명의 발악으로 생각했다. 이후에도 그 친구가 나를 무시하는 과정은 상당히 노골적이었다. 같이 놀리던 남자 친구들이 가끔은 나를 감싸줄 정도였으니까. 나는 졸업사진 회의 시간만 되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귀에 꽂은 이어폰을 더 꽉 조인 채 소리를 끝까지 키워 올렸다. 그 누구의 응답에도 반응하고 싶지 않았다.
며칠 후 나는 조용히 우리 반 J에게 도움을 청했다. 교실에서 손에 꼽는 대화를 나누는 여자 친구였던 J는 나의 고민에 적극적으로 응해주었다. 사실 그녀도 나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고민도 없이 정 갈 곳이 없다면 한 자리가 남는 자신의 조로 오라는 놀라운 조언을 해주었다. 아직 정한 것이 없어서, 와서 같이 콘셉트부터 정해 나아가도 좋다는 말도 남겼다.
아무도 날 품어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갈 곳은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나고, 우린 계속해서 회의를 이어갔다. 조별 콘셉트 의상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조별 포즈 등. 계속해서 조에서 소외되는 느낌을 받았던 나는 J가 포함된 조의 친구들에게 모두 동의를 구한 후 그날 결심을 했다.
웬걸, 종례가 끝나고 담임 선생님을 찾아뵈러 가니, 나를 겨냥해 그런 말을 한 친구가 담임 선생님께 조별 인원이 너무 많다고 무조건 조별 인원을 줄여달라며 하소연하고 있었다. 사실 말이 하소연이지, 어디까지나 나랑 같이 사진을 찍기 싫어서 하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나는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너와는 다른 대인배라는 어투로 조를 바꾸겠다고 당당하게 외쳤다. (사실 어깨도 말려들어 가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였다.) 당당하게 뒤를 돌고 그대로 하교했다.
새로운 조에서 새롭게 준비하는 졸업사진은 훨씬 좋았다. 자유롭게 화장도 하고, 옷도 꾸며 입고, 나를 뽐낼 수 있었다. 사실 처음엔 주춤거렸지만, 더 이상 나를 막을 존재는 사라졌다. 덕분에 난 후회 없이 최고의 헤어&메이크업을 하고, 멋진 의상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게 되어 그날 하루는 행복했다.
그런데 난 대체 왜 그들에게 벌벌 떨어야 했을까. 단지 “제가 성‘소수자’니까요”, 그 이상의 어떤 깊은 이유는 없는 것일까. 혼자 곰곰이 따져보다, 어쩌면 그냥 나도 날 한 명의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저 당당하게 살아가면 될 텐데 말이다. 혼자서 생각할 권리는 있지만, 누구도 나를 대놓고 까 내리거나 싫어할 이유는 없다.
어쨌든 일련의 사건들이 지난 요즘은 나 자신이 당당하고, 그때 수그린 것에 대해 후회가 밀려온다. 다시 그 순간이 찾아온다면 의자를 뻥 차고 당당하게 맞섰을 텐데. (사실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만약 나에게 또 한 번의 졸업사진을 촬영할 기회가 찾아온다면, 누군가의 졸업사진을 바라볼 기회가 생긴다면 난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왜 우리가 숨어야 하는가.
오늘도 어딘가에서 또 다른 시련을 겪고 있을 청소년 성소수자 친구들이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그날을 꿈꾸며 방에서 외쳐본다.
하나!
둘!
셋!
찰칵!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다다님의 글이 현실적인 소재를 통해 구체적인 삶을 드러낸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곳에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방식으로 존재해야 하는 상황, 나와 함께하지 않겠다고 발악하는 목소리에 아무렇지 않은 척 내는 목소리는 우리 모두의 삶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럼에도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곳을 찾는 용기와 의연함을 내세우는 의지는 우리에게도 용기와 의지를 전합니다. 괄호 안에 숨겨진 진심과 괄호로 드러나는 유머는 우리의 삶이 괄호로 묶여 삭제되지 않으리라는 희망이 됩니다.
심사위원 현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