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언제나 그런 말을 듣는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나는 언제쯤 이 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을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2일 차이로 나보다 늦게 전학해 온 그 아이에게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는 여자애들끼리 서로 ‘자기야’라고 부르며 사귀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의 고백으로 우리는 농담처럼 사귀었고 나는 농담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우리의 마음이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그 끝을 미루고 있었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남자아이에게 그 아이와 사귄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이 끝이 났고,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여자애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뭐든 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남자 아이돌에 관심을 가져보기도 하고 머리를 자르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에 머리도 짧은 머리로 잘랐었다. 머리를 자르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오빠’였다. 하지만 여자애들에게 오빠 소리를 들으며 깨달은 것은 내가 남자가 되고 싶어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남자의 대용품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고 남자로서가 아닌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에 당당했다. 친구들에게 농담이 아닌 진짜로 여자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밝히고 다녔다. 그때는 왜 숨겨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고 성소수자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다.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자연스레 받아들여 주던 친구들도 한몫했다.
그런 나의 생각을 바꾸어 준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한 아이는 기독교를 모태신앙으로 가지고 있었다. 나와 같은 반이었던 그 아이는 내가 친구에게 자기라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여자끼리는 사귈 수 없다며 말을 걸었다. 나는 왜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아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흔히들 말하는 이유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항상 하는 반박이 있다. 그건 불임부부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그들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냐고.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을 다문다. 이 경험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또는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한 명은 6학년 때 만났다. 이때는 레즈비언이나 게이 같은 성소수자 관련한 이야기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을 때였다. 나름 요령이 생겨서 친하거나, 받아들일 것 같은 친구들에게만 커밍아웃을 했었다. 그러던 중 그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한 다음 날, 자기를 좋아해서 스킨십을 하는 거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조금 당황했다. 나는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 친구들과의 스킨십이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그런 내 행동이 타인에게 성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은 꽤 충격적이었다. 그 후로 내가 성적인 의미를 전혀 담지 않아도 성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친구들과 스킨십을 할 때는 좀 더 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학생 때는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했다. 이전에 살던 곳에서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 만난 것이 나의 첫 여자 친구였다. 처음엔 마냥 좋았다. 같이 손잡고 얘기하는 모든 순간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담임선생님과 연애 관련한 이야기를 하다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사춘기라 남자애 같은 여자애를 좋아하는 거라며 아직 어려서 착각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머리 길고 예쁜 애들이 좋다고 하자 “그럼 네가 남자애 같은 역할인 거지.”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성인이 되어서 말을 했다면 다르게 말했을 거라고 덧붙이셨다. 자기 제자 중에도 레즈비언이 있다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이미 그런 고민을 했고,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나는 지금 짧은 머리이고, 그 아이는 내가 짧은 머리라서 관심을 가졌다. 나는 두려워졌다. 만약 또 일방적인 연애라면? 나를 남자애 대신으로 여기는 거라면? 그래서 그 아이를 엄청 떠봤다. 머리를 기를지 말지, 치마를 입을지 바지를 입을지.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한 발상이다. 하지만 그때는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100일이 조금 넘어서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그런 고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면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겠지만 이미 그런 고민을 한참 하던 나에겐 오히려 독과 같은 조언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남자애들 대신 그나마 남자애 같은 여자애를 만나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년이 조금 지났을까 남들보다 바쁜 학교생활을 보내던 어느 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턴 순조로운 연애가 이어졌다. 엄청 꽁냥대고 가끔은 같이 화장실에 들어가 남몰래 스킨십을 나누기도 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니, 커밍아웃도 편해졌다. 여자 친구가 있으니, 자신을 좋아하냐는 질문도 들을 일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우리는 첫 키스를 했다. 그게 계기였을까. 친구와 연인의 차이가 스킨십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는 애정결핍이 있었다. 남들보다 더 애정에 고파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스킨십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스킨십을 하면 그 아이는 웃으며 피했다. 그 상황이 반복되자 나는 또 불안해졌다.
학교는 참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성애자가 많다 보니 아무리 당당해도 자연스레 내가 소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친구들의 연애를 보고 있으면 자꾸 비교하게 됐다. 친구들에 비하면 우리는 데이트도 안 하고 스킨십도 잦지 않았다. 점점 외로워졌다. 비밀 연애라 특히 더 그랬다. 아무도 우리가 사귀는 줄 모르고 나조차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연애가 아니라 친구의 연장선은 아닐까? 그때 처음으로 여자를 좋아하는 내가 미워졌다. 홧김에 ‘남자를 사귈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연애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이렇게 힘든 연애를 하는데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친구들을 보니 화도 났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렸던 것 같다. 그때는 내가 다 큰 줄 알았다. 남들보다 빨리 큰 것은 맞았지만 나도 아직 중학생일 뿐이었다. 나를 성장시켜 줄 어른이 필요했다. 의지할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도로 한가운데에 핀 들꽃이었다. 바로 옆을 보면 화단에 꽃이 모여 있으나 나는 갈 수 없다. 홀로 남겨져 사람들의 발길질을 견뎌내야 한다. 그게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른 채로.
학교라는 곳의 특징은 내가 원치 않아도 같은 사람을 매일 봐야 한다는 점에 있다. 나와 친한 친구가 호모포비아여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학교에서 나는 ‘오픈 퀴어’인 채로 다니지만 대놓고 동성애자라고 티를 내고 다니진 않는다. 학교 또한 작은 사회이다. 지나치게 솔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12년이 지나서야 학교가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이다. 난 항상 내가 다 컸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지난 시절의 나를 돌아보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학교라는 곳은 무언가를 배우는 곳이다. 하지만 나는 나 혼자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알려줬다면 나는 이것보단 덜 아프고 더 빨리 알았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항상 말한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서 아직 몰라서 그런 거라고 우긴다면, 우린 대체 언제 알 수 있을까.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세하님의 글이, 여러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다양한 감정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짜임새 있게 풀어낸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 사회에서, 세하님의 '배움'들을 낱낱이 드러내 보이는 것은, 퀴어 청소년으로서 마주하는 여러 겹의 억압과 편견을 부수는 일이었습니다. '학교'는 퀴어 청소년에게 어렵고 힘든 시공간입니다. 때로는 날카롭게 빗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찬란히 빛나기도 하는 각각의 소중한 순간들이 그 안에 있었고, 늘이거나 줄이는 것 없이 세하님 그 자체의 모습 그대로, 글 속에 생생히 살아 있었습니다. 심사위원 다랴 |
우린 언제나 그런 말을 듣는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나는 언제쯤 이 말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을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2일 차이로 나보다 늦게 전학해 온 그 아이에게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는 여자애들끼리 서로 ‘자기야’라고 부르며 사귀는 것이 유행이었다. 나의 고백으로 우리는 농담처럼 사귀었고 나는 농담이 아니었을 뿐이었다. 우리의 마음이 같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저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그 끝을 미루고 있었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남자아이에게 그 아이와 사귄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사실을 인정했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이 끝이 났고, 같은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 다른 이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여자애들의 호감을 얻기 위해 뭐든 했던 것 같다. 처음으로 남자 아이돌에 관심을 가져보기도 하고 머리를 자르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말에 머리도 짧은 머리로 잘랐었다. 머리를 자르고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오빠’였다. 하지만 여자애들에게 오빠 소리를 들으며 깨달은 것은 내가 남자가 되고 싶어서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남자의 대용품으로 취급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고 남자로서가 아닌 여자로서 사랑받고 싶었다. 나는 여자를 좋아한다는 것에 당당했다. 친구들에게 농담이 아닌 진짜로 여자를 좋아한다고 당당히 밝히고 다녔다. 그때는 왜 숨겨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고 성소수자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다.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자연스레 받아들여 주던 친구들도 한몫했다.
그런 나의 생각을 바꾸어 준 사람이 두 명 있었다. 한 아이는 기독교를 모태신앙으로 가지고 있었다. 나와 같은 반이었던 그 아이는 내가 친구에게 자기라며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여자끼리는 사귈 수 없다며 말을 걸었다. 나는 왜냐고 물었고 그 아이는 아이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흔히들 말하는 이유였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항상 하는 반박이 있다. 그건 불임부부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그들에게도 똑같이 말할 수 있냐고.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을 다문다. 이 경험으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또는 그 사람이 기독교인이라면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한 명은 6학년 때 만났다. 이때는 레즈비언이나 게이 같은 성소수자 관련한 이야기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을 때였다. 나름 요령이 생겨서 친하거나, 받아들일 것 같은 친구들에게만 커밍아웃을 했었다. 그러던 중 그 친구에게 커밍아웃을 한 다음 날, 자기를 좋아해서 스킨십을 하는 거냐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말을 듣고 조금 당황했다. 나는 워낙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 친구들과의 스킨십이 자연스럽고 익숙했다. 그런 내 행동이 타인에게 성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은 꽤 충격적이었다. 그 후로 내가 성적인 의미를 전혀 담지 않아도 성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친구들과 스킨십을 할 때는 좀 더 조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학생 때는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했다. 이전에 살던 곳에서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새로운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다. 그때 만난 것이 나의 첫 여자 친구였다. 처음엔 마냥 좋았다. 같이 손잡고 얘기하는 모든 순간이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담임선생님과 연애 관련한 이야기를 하다가 여자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사춘기라 남자애 같은 여자애를 좋아하는 거라며 아직 어려서 착각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는 머리 길고 예쁜 애들이 좋다고 하자 “그럼 네가 남자애 같은 역할인 거지.”라고 하셨다. 그러고는 성인이 되어서 말을 했다면 다르게 말했을 거라고 덧붙이셨다. 자기 제자 중에도 레즈비언이 있다고.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나는 이미 그런 고민을 했고,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나는 지금 짧은 머리이고, 그 아이는 내가 짧은 머리라서 관심을 가졌다. 나는 두려워졌다. 만약 또 일방적인 연애라면? 나를 남자애 대신으로 여기는 거라면? 그래서 그 아이를 엄청 떠봤다. 머리를 기를지 말지, 치마를 입을지 바지를 입을지.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한 발상이다. 하지만 그때는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100일이 조금 넘어서 우리는 헤어졌다. 내가 그런 고민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면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겠지만 이미 그런 고민을 한참 하던 나에겐 오히려 독과 같은 조언이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남자애들 대신 그나마 남자애 같은 여자애를 만나는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년이 조금 지났을까 남들보다 바쁜 학교생활을 보내던 어느 날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때부턴 순조로운 연애가 이어졌다. 엄청 꽁냥대고 가끔은 같이 화장실에 들어가 남몰래 스킨십을 나누기도 했다. 연애를 시작하고 나니, 커밍아웃도 편해졌다. 여자 친구가 있으니, 자신을 좋아하냐는 질문도 들을 일이 없었다. 그렇게 1년이 흐르고 우리는 첫 키스를 했다. 그게 계기였을까. 친구와 연인의 차이가 스킨십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나는 애정결핍이 있었다. 남들보다 더 애정에 고파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스킨십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부끄러워한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스킨십을 하면 그 아이는 웃으며 피했다. 그 상황이 반복되자 나는 또 불안해졌다.
학교는 참 폐쇄적인 공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성애자가 많다 보니 아무리 당당해도 자연스레 내가 소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곳에서 나는 이방인이었다. 친구들의 연애를 보고 있으면 자꾸 비교하게 됐다. 친구들에 비하면 우리는 데이트도 안 하고 스킨십도 잦지 않았다. 점점 외로워졌다. 비밀 연애라 특히 더 그랬다. 아무도 우리가 사귀는 줄 모르고 나조차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연애가 아니라 친구의 연장선은 아닐까? 그때 처음으로 여자를 좋아하는 내가 미워졌다. 홧김에 ‘남자를 사귈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연애 상대가 여자라는 이유로 이렇게 힘든 연애를 하는데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친구들을 보니 화도 났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렸던 것 같다. 그때는 내가 다 큰 줄 알았다. 남들보다 빨리 큰 것은 맞았지만 나도 아직 중학생일 뿐이었다. 나를 성장시켜 줄 어른이 필요했다. 의지할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도로 한가운데에 핀 들꽃이었다. 바로 옆을 보면 화단에 꽃이 모여 있으나 나는 갈 수 없다. 홀로 남겨져 사람들의 발길질을 견뎌내야 한다. 그게 언제 끝이 날지도 모른 채로.
학교라는 곳의 특징은 내가 원치 않아도 같은 사람을 매일 봐야 한다는 점에 있다. 나와 친한 친구가 호모포비아여도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학교에서 나는 ‘오픈 퀴어’인 채로 다니지만 대놓고 동성애자라고 티를 내고 다니진 않는다. 학교 또한 작은 사회이다. 지나치게 솔직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12년이 지나서야 학교가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 것이다. 난 항상 내가 다 컸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지난 시절의 나를 돌아보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학교라는 곳은 무언가를 배우는 곳이다. 하지만 나는 나 혼자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알려줬다면 나는 이것보단 덜 아프고 더 빨리 알았을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항상 말한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서 아직 몰라서 그런 거라고 우긴다면, 우린 대체 언제 알 수 있을까.
[심사위원 작품평]
심사위원들은 세하님의 글이, 여러 사람과의 관계에서 느꼈던 다양한 감정들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짜임새 있게 풀어낸 점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린 것'이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는 이 사회에서, 세하님의 '배움'들을 낱낱이 드러내 보이는 것은, 퀴어 청소년으로서 마주하는 여러 겹의 억압과 편견을 부수는 일이었습니다. '학교'는 퀴어 청소년에게 어렵고 힘든 시공간입니다. 때로는 날카롭게 빗나가기도 하고, 때로는 찬란히 빛나기도 하는 각각의 소중한 순간들이 그 안에 있었고, 늘이거나 줄이는 것 없이 세하님 그 자체의 모습 그대로, 글 속에 생생히 살아 있었습니다.
심사위원 다랴